[그날 그후] LG 창업세대 별세 이후 ‘구광모 조력자’ 권영수의 '뚝심'...'뉴 LG' 혁신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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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후] LG 창업세대 별세 이후 ‘구광모 조력자’ 권영수의 '뚝심'...'뉴 LG' 혁신 남았다
  • 박근우 기자
  • 승인 2020.12.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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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본무 별세 이후 갑작스런 '4세 경영체제' 구광모...권영수, (주)LG COO 공동대표 체제 구축
- 권영수, 젊은 총수 구광모 멘토 역할 및 LG그룹 비전과 미래 신성장 사업 등 이끌 핵심 조력자
- 구본준 고문의 (주)LG신설지주 계열분리, 상속세 문제, 미래 먹거리 등 숙제 '산적'

젊은 총수, '4세 경영' 구광모 LG 회장이 취임 3년차를 맞아 '뉴 LG'로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나서고 있다. 

구 회장은 아버지 구본무 회장의 빈자리가 크다. 더욱이 할아버지 구자경 명예회장도 2019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외로운 구 회장을 곁에서 지켜준 사람이 바로 '권영수 부회장'이다. 

권 부회장은 국제그룹 사위 출신으로 '전략 재무통'이다. 무엇보다 '1등 DNA' 전도사 역할을 한다. 구 회장이 밝힌 '집요함'은 1등 DNA와 일맥상통한다. 

구 회장의 경영 행보는 기존 LG그룹의 문화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정도경영'을 계승하면서도 ‘실용주의’에 방점이 찍혔다. 비핵심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했다. 대신 로봇, 인공지능(AI), 전장, 5G 등 미래 성장 사업에 투자를 집중했다. 수평적 조직문화를 정착시켰다. 이같은 과정에는 '정통 LG맨'으로서 권 부회장의 '뚝심'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숙부인 구본준 고문과의 계열 분리, 상속세 납부, 포스트 코로나 시대 대응,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 돌파 등 산적한 과제가 남아 있다. '뉴 LG'로의 구체적 비전도 제시해야 한다. 권 부회장이 구 회장의 멘토이자 조력자로서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 셈이다.

 

◆ 그날

구본무 이어 구자경, 잇단 별세...구광모 곁에 권영수 있었다

2019년 12월 14일 오전 10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숙환으로 별세했다. 구인회 LG 창업주-2대 회장 구자경-3대 구본무에 이르는 LG 창업세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4대 구광모 LG 회장은 홀로 남았지만, 조력자 권영수 부회장이 곁에 있었다.

LG 관계자는 "장례는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르기로 했다"며 "유족들이 온전히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별도의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한다"고 전했다.

권영수 부회장

구자경 명예회장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1925년에 태어났다. 1945년 진주사범학교 졸업 후 5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다 1950년 LG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취임하면서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1969년 말 구인회 창업주가 타계하면서 1970년 2대 회장에 올랐다. 경영수업 20년만이었다. 이후 25년간 LG그룹을 이끌면서 LG전자와 LG화학을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그룹 총수 자리를 장남인 구본무 회장에게 승계했다. 이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지만 2015년까지 LG복지재단 이사장직은 유지하며 사회공헌활동을 이어왔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슬하에 구본무, 구본능, 구본준, 구본식 등 6남매를 뒀다.

생전의 구자경 명예회장(좌)과 구본무 회장

앞서, 3대 구본무 LG 회장은 2018년 5월 20일 오전 10시경, 숙환으로 별세했다. 아버지 구자경 명예회장 보다 일찍 세상을 뜬 것이다.

구본무 회장은 지난 2017년 4월 지병으로 수술을 받았고 지난 2018년 1월 다시 입원했다. 구 회장은 상태가 잠시 호전됐으나 다시 악화돼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구본무 회장은 서른살 때인 1975년 LG화학 심사과장으로 입사했고, 1980년 LG전자의 기획심사본부장이 됐다. 1985년 LG그룹 회장실 전무로 승진했고, 1989년 부회장이 됐다. 쉰살 때인 1995년 회장이 됐다.

구본무 회장은 △전문경영인에 의한 자율경영체제 구축 △소유구조 개선을 통한 국민기업 지향 △정도경영 추구 등 이른바 ‘실체개혁’을 단행했다. 이때 추진했던 혁신의 결과가 현재 LG의 긍정적인 기업 이미지, 안정적인 지배구조의 바탕이 됐다.

구본무 회장이 LG의 3세 경영체제를 이끌면서 초우량 글로벌 기업 ‘1등 LG’ 비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권영수 부회장의 1등 DNA가 결합한 것은 필연일 수도 있었다. 이는 4세 경영, 지금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구본무 회장의 별세는 73세의 나이를 감안할 때 갑작스런 일이었다. 후계자는 아들 구광모였지만 당시 41세의 젊은 나이였기에 세간의 우려도 많았다. 또한 구광모는 희성그룹 회장 구본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004년 12월에는 큰아버지 구본무 LG 회장의 양자로 입적된 바 있다.

◆ 그후

권영수의 1등을 향한 성공스토리...‘삼성맨 같은 LG맨’이라는 평가 나오는 이유

2018년 6월 29일. 당시 구광모 LG전자 상무가 LG그룹 지주회사인 (주)LG의 대표이사 회장직에 올랐다. 명실상부한 LG그룹의 총수로 수직상승한 셈이다.

우선은 너무 이른 나이에 회장직에 오른 만큼 구광모 회장을 보좌할 사람이 필요했다. 구광모 회장은 취임 직후인 7월, 속전속결로 원포인트 인사를 단행했다. 자신을 보좌할 최적임자로 권영수 부회장을 낙점했다. 당시 LG유플러스 대표이사였던 권영수 부회장이 (주)LG로, 하현회 LG 부회장이 LG유플러스로 자리를 바꾼 것이다.

이로써 권영수 부회장은 LG그룹의 지주회사인 (주)LG의 COO(최고운영책임자) 대표이사로서 구광모 회장과 각자 대표를 맡게 됐다. 권 부회장은 40대 초반의 젊은 총수인 구 회장의 멘토 역할은 물론 LG그룹의 향후 비전과 미래 신성장 사업 등을 이끌 핵심 조력자가 된 셈이다.

권 부회장은 그간 1등을 향한 집념과 성공 스토리 이력을 갖고 있었다. 권 부회장은 LG유플러스 대표이사를 떠나면서 직원들에게 "여러분에게 내재된 무한한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해 달라“며 ”여러분이 만들어갈 1등의 이야기에 미리 박수를 보내며, 함께한 모든 것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권영수 부회장

권 부회장은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산업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공부도 1등, 학력도 엘리트 코스다.

권 부회장은 지난 1979년 당시 금성사(현 LG전자)에 입사해 LG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39년 동안 여러 계열사를 거치는 동안 ‘정통 LG맨’으로서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1988년에 해외투자실에서 30대 초반에 최연소 부장에 오른 뒤 1991년 미주법인 부장을 맡았다. 1999년 LG전자 금융담당 상무보로 발탁돼 1년 만에 2000년 재경팀장 상무로 등극했다.

이어 2002년 재경담당 부사장에 올라, 2006년 40대 나이에 LG전자 재경부문장 사장(CFO)으로 승진했다. 2007년 LG필립스LCD로 자리를 옮겨 대표이사 사장을 맡은 후 사명을 LG디스플레이로 바꾼다. 2012년 LG화학으로 자리를 옮겨 전지사업본부 사장을 맡았다. 2015년 LG유플러스 부회장에서 올해 (주)LG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전문경영인 출신으로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권 부회장은 LG의 주요 핵심 계열사의 수장으로서 부임하면 임직원들에 늘 1등을 강조해왔다. 그의 성공 가도에는 ‘1등 DNA’가 따라붙었다. 그가 맡은 LG디스플레이와 LG화학 전지사업은 세계 1위가 됐다. 인화와 정도경영이 전통인 LG 문화에서 보면 ‘삼성맨 같은 LG맨’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권 부회장의 치열한 승부욕은 가족사와 국제그룹 사위라는 이력도 간과할 수 없다. 아버지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권력 핵심인 보안사령부 실세로 알려져 있다. 한 때 재계 7위였던 국제그룹은 전두환 군부정권에 밉보여 강제로 해체된 비운의 기업이다. 2009년 작고한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에게는 슬하에 2남 11녀가 있는데 그 중 9번째 사위가 권 부회장으로 알려져 있다. 권 부회장은 1990년대 자신의 집에서 양 회장을 잠시 모시기도 했다 한다.

LG유플러스 대표이사 시절의 권영수 부회장

권 부회장은 장인의 역경과 실패에서 1등만이 살아남는 냉혹한 현실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국제그룹과 LG는 공교롭게도 1947년, 부산에서 창업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창업 시기와 지역이 똑같다. 국제그룹은 1947년 고무신 공장으로 탄생한 기업인데 LG는 같은 해 락희화학공업사를 모태로 하고 있다. 권 부회장이 국제그룹 잔혹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이 몸담은 LG를 반드시 1등으로 만들겠다는 집념을 불태운 것은 아닐까. 권 부회장은 국제그룹 사위를 넘어 결국 LG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고 또 다른 도전에 직면했다.

권 부회장의 메시지는 끝과 시작이 같았다. 1등이다. 권 부회장은 지난 2011년 11월 LG디스플레이 사장에게 물러나며 임직원들에게 “영원한 1등이 되어달라”고 강조했다. 지난 2016년 1월 LG유플러스 시무식에서는 “우리 안에는 1등 DNA가 내재돼 있기 때문에 더 높은 목표에 과감히 도전하고 강하게 돌파하면 결국 우리가 꿈꾸는 1등을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등 DNA 승부사, 권 부회장의 성공 이력을 보면 구광모 경영체제의 미래가 담겨 있다. 권 부회장은 냉혹한 승부사답게 LG그룹 안에서 '칼(刀)'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칼같은 승부 근성의 권 부회장이 구광모 회장을 보좌해 선대 회장의 꿈인 1등 LG를 완성할 것인가 관심이 모아진 이유다.

권 부회장의 보좌 속에 구광모 회장은 그간 철저한 실용주의 경영전략을 보여줬다. 그룹 내 비주력 사업이나 우선 순위가 떨어지는 사업을 잇따라 정리했다. 그룹 차원에서 연료전지 업체인 LG퓨얼셀시스템즈 사업을 청산했다. LG디스플레이는 일반 조명용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사업에서 철수했다. LG전자의 수익성 악화 요인인 스마트폰 사업의 생산 거점도 베트남으로 옮겼다. 소모성자재구매(MRO) 사업을 영위하는 서브원 경영권을 매각했다.

구광모 회장(좌)과 권영수 부회장

반면 미래 신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투자에 공을 들였다. LG유플러스는 CJ헬로(현 LG헬로비전)를 인수했다. 벤처 투자사인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통해 지금까지 미국 스타트업에 지속적 투자를 진행 중이다. 대부분 자율주행, 인공지능, 로봇,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바이오·소재, 차세대 디스플레이 분야 등이다.

LG전자는 자동차 부품 사업 강화를 위해 오스트리아 차량용 조명기업 ZKW를 1조4440억원에 인수했다. 산업용 로봇 업체인 로보스타 경영권도 사들였다. 구 회장 취임 후 유망 신산업 분야에 계열사들이 투자한 인수금액만 수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파격적인 외부 인재 영입에도 나섰다. 세계적 첨단소재기업 미국 3M의 수석부회장 출신 신학철을 LG화학 부회장으로 전격 영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LG화학 창사 이래 외부 인사를 수장으로 앉히기는 처음이다. 이밖에 베인앤컴퍼니 대표 출신인 홍범식 (주)LG 경영전략팀 사장, 한국타이어 연구개발본부장 출신의 김형남 부사장 등도 ‘순혈주의’ 파괴 인사의 사례다.

수평적 기업문화도 더욱 확대됐다. 종전 5단계의 직급체계를 직책과 능력, 성과 중심의 3단계로 간소화했다. 자유롭고 유연한 업무 문화 차원의 복장자율화를 강화했다. 매주 월요일은 ‘회의 없는 날’로 정하기도 했다. 분기별 임원세미나도 100명 미만이 참가하는 월별 포럼 형식의 ‘LG 포럼’으로 바꿨다.

◆ 그리고, 앞으로

구광모 “고객에 대한 집요함" 주문...권영수의 숙제, 계열분리·상속세 등 산적

“고객에 대한 집요함을 바탕으로 지금이 바로 우리가 바뀌어야 할 변곡점이다.”

구광모 회장이 지난 9월 22일, 비대면 화상회의로 진행된 ‘사장단 워크숍’에서 밝힌 말이다. 핵심은 ‘집요함’이다. 이는 권 부회장의 ‘1등 DNA'와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앞으로 펼쳐질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대규모 시장 재편이 이뤄질 전망이라면서 이에 대해 집요함을 바탕으로 기민하게 대응하라고 주문한 것.

권영수 부회장(왼쪽)과 구광모 회장(오른쪽)이 사장단 워크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고 있다

구 회장은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개인화 트렌드가 ‘니치’(틈새시장)를 넘어 전체 시장에서도 빠르게 보편화될 것”이라면서 “앞으로의 경영환경은 더 심각해지고 어려움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어려움 속에도 반드시 기회가 있는 만큼 발빠르게 대응해 가자”고 강조했다.

권 부회장은 (주)LG COO로서 구 회장의 친정체제를 조기에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숙제가 많다. 무엇보다 미래 10년 이상을 내다보는 비전을 담은 그룹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일이다. 구 회장은 지난해 3월 열린 그룹 지주회사 주주총회에서 “시장을 선도하고 영속하는 LG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뉴 LG' 비전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히 구본준 LG 고문과의 계열분리가 당면 과제다. 지난 11월 26일, LG는 계열분리를 공식화했다. 내년 3월 주주총회를 거쳐 5월이면 (주)LG와 (주)LG신설지주(가칭)가 출범한다. 2004년 LG에서 GS가 분리됐던 것과 유사한 시나리오로 신설지주는 새 이름으로 독립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그림은 ‘전략재무통’인 권 부회장이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관측된다.

구광모 회장은 ㈜LG 전자·화학·통신서비스 영역에 집중하고, 숙부인 구본준 L고문은 LG상사(판토스), 실리콘웍스, LG하우시스, LG MMA를 손자회사로 둔 ㈜LG신설지주를 꾸리는 방식이다. LG 측은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돼 온 사업구조 고도화 전략의 일환으로 지주회사 인적 분할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구본준 LG 고문은 (주)LG신설지주(가칭)로 계열분리한다 

구 회장은 2018년 취임 후 3년 만에 사업구조 재편 작업을 마치고 (주)LG 핵심사업인 전자(가전, 디스플레이, 자동차 전장), 화학(석유화학, 배터리, 바이오), 통신서비스(5G, IT) 사업의 경쟁력 강화와 미래 신성장 동력 확보에 집중하게 된다. 글로벌 우위인 가전, 대형 OLED, 배터리 등의 선두 지위를 공고히 하고,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로봇 등 디지털 기술과 혁신 사업모델을 접목해 기업가치를 제고할 계획이다.

또한 권 부회장은 1조원에 달하는 구 회장의 상속세 납부도 숙제다. 날로 심각해지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 속에서 화웨이 제재 사태 여파도 우려스럽다. LG유플러스 대표이사 출신인 권 부회장으로서는 ‘화웨이 불똥’을 어떻게 처리할지 관심사다.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과 벌이고 있는 국제 소송전도 마무리지어야 한다.

재계 관계자는 "권영수 부회장은 구 회장을 대신해 여러 대외 행사 등에서 LG그룹 ‘얼굴’로 활동하고 있다"며 "그간 구 회장 체제 안착에 주력했다면 앞으로는 대형 M&A(인수합병), 인재 영입 추진 등을 진행하며 '뉴 LG'로의 도약에 주력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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