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해협의 경영자'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100년 '거목'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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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해협의 경영자'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100년 '거목'의 역사
  • 양현석 기자
  • 승인 2020.01.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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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농의 아들에서 재계 서열 5위 롯데그룹 일궈... 한일 재계에서 모두 존경받아
구순 넘어서도 현장 찾아 꼼꼼히 챙기는 열정 보여... 재벌 1세대 시대 저물어
포스트 신격호 시대... 신동빈 회장, 호텔롯데 상장 성공하면 “완전한 경영 승계”
2011년 롯데월드타워 공사 현장을 찾은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2011년 롯데월드타워 공사 현장을 찾은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대한민국 경제계 1세대 마지막 전설이 눈을 감았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9일 오후 4시 29분 숙환으로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에서 별세했다. 장례식은 그룹장으로 진행되며, 22일 발인 예정이다.

신격호 회장의 별세는 국내 재벌 1세대의 완전한 마감을 의미한다. 동시대에 활약했던 이병철 삼성 창업주, 정주영 현대 창업주, 최종건 SK 창업주 등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신격호 회장은 90세가 넘은 2010년대에도 직접 경영에 참여하고, 롯데월드타워 공사 현장을 찾는 등 현역에 몸담았다는 점에서 지금에야 1세대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격호 회장의 별세로 인해 롯데그룹의 경영 승계도 마무리 될 것으로 예측된다. 포스트 신격호 시대를 맞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발걸음도 바빠질 것으로 보인다.

‘대한해협의 경영자’로 불리며, 한일 양국 재계의 존경을 받던 ‘큰 어른’ 신격호 회장의 100여 년의 시간을 되짚어 본다.

젊은 시절의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모습.
젊은 시절의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모습.

 

▲경남 울주 빈농의 아들... 일본에 밀항해 롯데를 세우다

1921년 11월 3일(음력 10월 4일) 생인 신격호 회장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한일 양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인 롯데그룹을 창업해 현재의 위치에 올려놓은 신화적 인물로 평가된다.

고 신격호 회장은 1921년 경상남도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빈농인 신진수의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언양공립보통학교와 울산농업고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으로 밀항해 우유배달을 하며 와세다실업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이었다.

특유의 성실성을 인정받아 지인의 도움으로 1944년 커팅 오일과 밥솥 등을 만드는 공장을 차렸으나, 공습으로 인해 제대로 가동도 못해보고 공장이 완파되는 아픔도 겪었다. 종전 후 1946년 다시 비누 공장을 차려 성공했고, 1948년에는 당시에는 신문물이었던 '껌'을 직접 연구 개발하며 지금의 롯데의 초석을 닦았다. 그 후 50~60년대에는 일본에서 손에 꼽히는 식품회사로 성공했다.

1989년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한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1989년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한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고국이 원했던 한국 진출... 롯데, 대기업으로 성장하다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 되자 당시 외자유치에 적극적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재일교포의 국내 투자를 독려하고자, 외자도입법을 신설하고, 신격호 회장에게 국내에서 기업을 확장하라고 요청했다.

신격호 회장은 당시 낙후된 고국 경제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흔쾌히 이를 승낙하고 1967년 서울 용산구에 롯데제과 공장을 세웠다. 롯데제과는 일본에서의 노하우를 발판 삼아 한국에서도 빠르게 성장하며, 해태, 크라운, 오리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70년대에는 지금 롯데의 주력이 된 호텔과 유통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당시 국빈들이 묶을 고급호텔이 모자란다고 생각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내 기업들이 호텔 분야 진출에 소극적이자, 또 다시 신격호 회장에게 호텔사업을 제안했다.

일본에서도 식품사업만을 하고 있었던 롯데로서는 큰 결심이 필요한 사업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신의 한수가 돼 일본보다 한국에서 롯데가 훨씬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79년 소공동에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센터를 준공했으며, 같은 해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인수로 중화학공업에도 진출하며 한국에서도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신격호 회장은 1978년 총괄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롯데그룹을 본격적으로 지휘했다. 이 자리는 2017년 명예회장으로 퇴진할 때까지 40여 년, 1948년 일본에서 (주)롯데가 만들어진 지 70여 년간 롯데의 역사는 곧 신격호의 역사였다.

1980년대 세계 경제의 호황과 함께 롯데그룹도 순조롭게 성장했다. 1997년 경제위기에도 롯데와 신격호 회장은 오히려 과감한 투자를 통해 재계 순위를 더욱 높이 올렸다.

신격호 회장은 꼭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었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랜드마크를 꼭 한국에 만들고 싶었다. 그 위치가 지금의 잠실 롯데월드타워다.

신격호 회장은 1987년 잠실에 대지를 매입하며 초고층 빌딩 건설의 꿈을 현실화시키기 시작했으나, 오랫동안 공군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하다가 2017년이 돼서야 완공된 555m의 국내 최고층 건물을 찾아 만족스런 미소를 띠었다.

19일 저녁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진 신격호 명예회장 빈소에서 신동빈 롯데 회장이 분향을 하고 있다.
19일 저녁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진 신격호 명예회장 빈소에서 신동빈 롯데 회장이 분향을 하고 있다.

 

▲‘왕자의 난’... 아들들의 경영권 분쟁으로 아쉬운 말년 보내

신격호 회장에게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아무래도 깔끔하지 못한 경영권 승계일 것이다. 롯데판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동주, 동빈 형제간의 갈등은 2015년 본격화됐다. 신동빈 현 롯데 회장이 2015년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 부회장에 선임된 것이 공식적인 형제의 난의 시작이었다.

신동빈 회장이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롯데그룹을 장악하자,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신동주 전 부회장의 무기는 바로 아버지인 신격호 명예회장이었다. 신격호 명예회장의 지원을 받은 신동주 부회장은 신동빈 회장을 해임하려 했으나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 신격호 명예회장도 롯데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직을 내려놓게 됐다.

형제간의 경영권 다툼 중 신격호 명예회장의 건강 문제가 이슈화 됐다. 신격호 명예회장의 의중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따지는 와중에 신 명예회장이 치매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결국 법원으로부터 한정 후견인이 지정되면서 경영 승계 과정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현재 롯데그룹의 경영 승계는 신동빈 회장의 완승으로 기울고 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이 SDJ코퍼레이션을 설립해 꾸준히 경영권에 도전하고 있지만, 자타 공인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신동빈 회장이 계획대로 호텔롯데를 상장해 일본 측 지분 희석에 성공하면 복잡한 지배구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돼 명실상부한 롯데그룹 ‘원톱’ 자리를 굳힐 것으로 보인다.

양현석 기자  market@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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