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우 칼럼] '이건희 컬렉션'의 유산 '물납제', 그리고 '한국판 테이트 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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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우 칼럼] '이건희 컬렉션'의 유산 '물납제', 그리고 '한국판 테이트 모던'
  • 박근우 기자
  • 승인 2021.05.26 0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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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컬렉션’ 가치 약 3조원...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예산 300년간 구입 규모
- 예술품으로 상속세 대신 납부 가능한 '물납제' 도입 현실화해야

“자작나무의 꽃말은 ‘당신을 기다립니다’인데 박수근 화백의 작품이 고향 양구에 돌아왔습니다.”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에 위치한 박수근미술관 측은 ‘이건희 컬렉션’ 중 국민화가 박수근 화백의 작품이 다시 돌아오자 감격했다.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 여사(전 리움미술관장)가 미술관 건립 당시 기증한 자작나무들이 숲을 이룬 모습을 바라보며 오랜 인연이 오버랩됐던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 나비효과, 지방 관광산업과 지역경제 활성화 기폭제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기부에서 놀라운 점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유족들이 서울은 물론 지방 작가들의 연고지 미술관까지 챙겼다는 사실이다. 전남도립미술관에는 전남 일대에서 활동한 동양화가 허백련, 대구미술관에는 대구 대표 화가 이인성, 제주 이중섭미술관에는 이중섭, 강원도 박수근미술관에는 박수근의 작품을 기부하는 식으로 각 지역별 특성까지 감안했다.

박수근 화백의 '아기 업은 소녀'

박수근미술관은 최근 ‘이건희 컬렉션’ 18점을 중심으로 기증의 의미와 작품의 가치를 전하고자 ‘박수근미술관 아카이브 특별전’을 열었다. 그러자 최북단 군사지역에 위치하고 인구 2만명 남짓인 양구군에 전국 각지에서 연일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방문객 수는 기증 전보다 3배 이상 증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건희 미술관’ 건립 취지의 언급을 하자 전국 지방자치단체는 유치전에 사활을 걸었다.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하는 지자체는 관관산업은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에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청와대 회의에서 "(유족들이) 기증한 정신을 잘 살려서 국민이 좋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별도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말했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릅 회장 유족 측이 지난달 삼성가에서 2대에 걸쳐 모아온 예술품 1만1023건, 약 2만3000점을 기증하자 우리나라에도 ‘문화 기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건희 컬렉션’ 영향으로 최근 미술품 기증도 늘고 있다고 한다.

모네의 명화 1점에 800억원...한국 국립미술관, 1년 구입 예산 40억원 

문화예술계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의 가치를 2조5000억~3조원 정도라고 추산한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연간 소장품 구입예산은 80억7000만원(각각 약 40억원)에 불과하다. 두 국립 미술관이 300년간 구입해야 하는 천문학적 규모인 셈이다. ‘세기의 기부’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례로 지난 12일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클로드 모네의 그림 <수련>이 798억원에 낙찰됐다. 모네의 <수련>은 ‘이건희 컬렉션’의 모네 그림과 크기와 구도가 같고, 제작 시기도 유사하다. 두 국립 미술관의 10년 예산인 셈이다. 명화 한 점에 1000억원이 넘는 서양 근현대미술품을 국립미술관 예산으로는 1년에 한 점도 구입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예술을 사랑했던 이병철 삼성 창업주(좌)와 이건희 회장

문제는 기증이 선의(善意)에서 나오지만 기증자에 대한 예우는 너무나 소박하다는 점이다. 기증품을 모아 특별 전시를 개최하거나, 기증자나 유족의 이름을 미술관 벽면에 새기거나, 감사패를 전달하는 정도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한 글에서 “유족과 삼성 측에서는 상속세법을 떠나 이건희 회장의 미술문화에 대한 사랑과 사회봉사 정신을 살려 국가에 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라며 “이번 기부에 조건이 있었다면 지방 미술관에 작품을 미리 배정해 준 것이다. 이는 삼성이 우리나라 지방 미술관의 실태가 얼마나 열악한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준 선처라고 생각한다”고 전했을 정도다.

‘문화 기부’ 활성화를 위한 인센티브 개발이나 제도적 장치가 강화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다. 특히 미술품 등 예술품으로 상속세를 대납하는 ‘물납제’ 도입 논의가 뜨겁다. 국내 현행법상 상속세와 재산세는 부동산과 유가증권으로 물납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제 예술품도 물납에 포함하자는 것이다.

'물납제'로 세계 최고 박물관으로 성장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영국 '테이트 모던'

세계 최고의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는 매년 1000만명의 관람객이 몰린다. 하루 1만5000명 이상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먼 발걸음을 한 것이다. 그런데 루브르 박물관은 ‘물납제’를 통해 성장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각에서 우려하는 소장품 감정 문제는 권위있는 감정평가에 의해 자산가치를 매길 수 있다고 미술계는 자신한다. 상속세 범위 내에서 물납제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백기영 서울시립미술관 운영부장은 “국가의 공공재인 문화재나 미술품을 증여세 대신에 물납제를 현실화해야 한다”며 “물납제에 따라 소장품을 소유한 재력가들이 사회환원을 한다면 상징적 의미 뿐만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기증문화로 국공립 미술관 등에 다량의 기증이 늘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삼성미술관 ‘리움’을 세계적 미술관으로 만들기 위해 정성을 쏟아왔다. 미술관을 통한 문화강국을 꿈꿨던 것.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 LA의 폴 게티 뮤지엄, 빌바오의 구겐하임 뮤지엄 등을 구상했을 수 있다. 명화 한 점에 1000억원이 넘는 서양 근현대미술품을 사재를 털어 구입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희 컬렉션’은 리움으로 못가고 상속세 대상이 됐다.

‘물납제’는 개인 금고 안에 들어 있던 우리 문화재를 세상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다. 물납제는 개인의 희생과 노력이 아닌 제도를 통해 우수한 문화유산을 확보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미술품 물납제도는 프랑스가 1968년 세계 처음 도입했다. 국가유산을 박물관이 잘 보존할 수 있게 조세 금전납부 원칙의 예외를 뒀다. 영국은 물납을 승인받은 납세의무자는 부담 상속세에서 25%의 세금 감면 혜택을 받도록 했다. 일본은 동산에도 물납을 허용하고, 상속세에 한해 미술품 물납을 허용하고 있다.

기증자 이름을 국립미술관 명칭으로 사용해 혜택을 주기도 한다. 영국의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2019년 600만 명 넘게 방문했다. 영국 국립현대미술관 이름이 테이트인 이유는 사업가 헨리 테이트가 국가에 기증한 근현대미술품 65점과 건립 비용을 토대로 1897년 세워졌기 때문이다.

기증자 이름을 명칭으로 사용하는 영국 국립박물관 '테이트 모던'

빈센트 반고흐 작품을 270점 이상 소장한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도 소장품과 미술관 부지를 기증한 설립자 이름을 딴 국립미술관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도 예술품 수집가였던 티센 보르네미사 남작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설립된 국립미술관이다.

과연 한국판 ‘테이트 모던’ 국립 이건희미술관이 세워질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쉽지 않을 지 모른다. ‘이건희미술관’이 세워진다면 세계인들이 한국을 찾을지도 모른다. ‘재벌 삼성’이라는 색안경 보다는 안목 높은 예술품수집가로서 문화 기부의 선례를 남긴 ‘이건희 컬렉션’을 바라보자는 문화계의 평가도 나온다. ‘물납제’는 ‘이건희 컬렉션’이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이 되고 있다.

박근우 전문위원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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