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대한민국 전자·화학 강국 선구자'...'R&D 중시' 전통 구본무·구광모 계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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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대한민국 전자·화학 강국 선구자'...'R&D 중시' 전통 구본무·구광모 계승해·
  • 박근우 기자
  • 승인 2019.12.14 1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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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자경 명예회장 14일 별세...향년 94세
- LG그룹, 25년간 회장 재임하며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 직원 2만명에서 10만명 규모로 성장시켜
- 70세 나이에 젊은 세대에게 회장직 넘겨 '아름다운 경영 표본' 귀감으로 남아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구인회 창업회장의 뒤를 이어 1970년 1월부터 1995년 2월까지 만 25년 동안 LG의 2대 회장으로 재임했다.

1950년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으로 LG맨의 길에 들어선 구 회장은 1970년부터 25년간 회장으로 그룹을 이끌며 한국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특히 LG전자와 LG화학의 기틀을 다져 LG(당시 럭키금성그룹)를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며 '대한민국 전자·화학 강국'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구자경 명예회장이 그룹을 이끄는 25년간 매출은 260억원에서 30조원 대로 커졌고, 2만여명이던 직원은 10만여명으로 늘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1950년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에 입사한 이래 20여 년간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경영 역량을 바탕으로 기술과 인재를 중시했다. 경영혁신을 주도하며 자율경영을 정착시켰다.

'강토소국 기술대국'을 신념으로 여겼던 구자경 명예회장에게 가장 중요한 경영의 가치는 기술이었다.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배워야 한다',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친다' 등 기술에 믿음을 보여주는 말들을 남겼다.

특히 나름의 철학과 소신으로, 70세 나이에 은퇴의 용단을 내리고 젊은 세대인 장남(고 구본무 회장)에게 경영을 물려줬다. 과거나 지금이나 조기에 회장직을 물려주는 경우는 드물다.

고 구자경 LG 명예회장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1925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부친 연암 구인회와 모친 허을수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유림에서 존경받던 증조부 만회 구연호 공의 사랑과 외유내강형의 선비로 유교의 전통과 신문화의 합리적 사고를 함께 지녔던 조부 춘강 구재서 공의 가르침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형제간의 우애와 근검한 생활을 중요시하는 가통 속에서, 특히 장남으로서 집안의 중심 역할이 가져야 할 ‘책임감’과 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이렇게 자리 잡은 가치관은 경영활동에도 면면히 이어져 경영자로서 스스로에게 엄격함을 유지하는 한편, 항상 리더로서의 역할과 책임의식을 먼저 떠올렸다.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지수보통학교를 거쳐 부산사범대 부속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1950년, 부친의 부름을 받아 락희화학에 입사하여 서울의 화장품연구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뒤이어 발발한 6·25 동란으로 인해 연구 업무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 채 부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구자경 명예회장(앞줄 가운데)의 미수연에 모인 가족들. 뒷줄에 구광모 LG 회장도 보인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주로 생산현장에서 직원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럭키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었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갔다.

하루걸러 숙직을 하며 새벽부터 몰려오는 도매상들을 맞았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공장가동을 준비했다. 판자를 잇댄 벽에 깡통을 펴 지붕을 덮은 공장에서 숙직할 때면, 판자 사이로 들어온 모래바람 때문에 자고 나면 온몸이 모래투성이였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허름한 야전점퍼에 기름을 묻히고 다니는 모습이 영락없는 현장 근로자였다.

흔히 경영수업이라고 하면 영업이나 기획 분야, 해외지사에서 몇 년간 실무를 보다가 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쳐 경영자로 나가는 것이 익숙한 관행이다.

반면 구자경 명예회장은 10년 이상 공장생활을 하며 ‘공장 지킴이’로 불릴 만큼 현장 수련을 오래 했다.

사람들이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에게 “장남인데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할 정도였으나, 구인회 창업회장은 “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무수한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며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창업 초기부터 회사운영에 합류하여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을 도와 LG를 일궈온 1.5세대 경영인이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LG는 부산의 부전동공장, 연지공장과 동래공장, 초읍공장, 온천동공장 등 생산시설을 연이어 확장하며 화장품, 플라스틱 가공 및 전자산업에서 국가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청소년들의 과학에 대한 꿈을 키워주기 위해 여의도 트윈타워에 설립한 'LG 사이언스홀'이 2012년 개관 25주년을 맞아 어린이들과 함께 했다

구자경은 플라스틱 가공제품의 국내 최초 생산 현장은 물론, 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라디오를 생산하는 과정도 직접 챙겼다. 이 땅에 화학공업과 전자사업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몸소 겪은 것이다. 

LG의 어느 공장이든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공장에 따라서는 어느 상자에 어떤 공구가 들어 있고, 누가 어떤 작업을 잘 하는지도 훤히 꿰고 있을 정도였다.

특히 구자경 명예회장의 기술에 대한 신념은 국내에서 연구개발(R&D) 투자에 대한 의미를 모르던 1970년대 부터 빛을 발했다. 구 명예회장의 회장 재임 기간 동안 만들어진 LG의 연구소가 70여개에 달한다.

1970년대 중반 럭키(현 LG화학) 울산·여천 공장이 가동되기 전부터 연구실을 만들었을 정도로 기술개발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1976년에는 금성사(현 LG전자)의 공장 별로 운영되던 소규모 공장 한계를 극복하고자 민간기업 최초로 전사적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1974년에는 금성사에 디자인 연구소를 발족시켰다.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내의 첫 민간연구소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키고 고분자·정밀화학 분야를 집중연구토록 했다. 1985년에는 국내 최초로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해 품질을 끌어올렸다. 또 같은해 전자계열사들이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조성하기도 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의 R&D 열정은 은퇴를 석달 앞둔 1994년 11월에는 나흘에 걸쳐 전국에 위치한 LG그룹 연구소 19개소를 일일이 찾아 둘러보며 흐뭇해 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의 R&D전통은 아들인 故(고) 구본무 회장, 손자인 구광모 회장으로 이어졌다. 

구본무 회장이 조성한 서울 마곡에 조성된 LG그룹의 연구단지인 'LG 사이언스파크'가 LG의 미래인 이유다. 구광모 LG회장은 지난해 회장직에 오른 후 가장 먼저 LG사이언스파크를 찾았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LG의 주력인 전자와 화학의 글로벌 기업 기틀을 만들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R&D 사랑은 전자와 화학 등을 LG그룹뿐 아니라 한국의 주력 사업으로 키우는 원동력이 됐다. 한국을 상징하는 'ICT 강국'의 뿌리가 바로 LG다. 구자경 명예회장이 전력을 투구한 연구개발 덕분에 금성사는 19인치 컬러 TV,를 비롯 냉장고 등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슬림형 냉장고 등 '국내 최초' 제품을 만들어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기업의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실천한 혁신가였다.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하였고, 국내 기업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던 해외 생산공장 설립을 과감히 실행하여 우리나라 기업경영의 질적인 성장 사례의 본보기가 되었다.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는 다가올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기업체질을 갖추기 위한 경영혁신 활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했다. 계열사 사장들이 ‘자율과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LG의 ‘컨센서스(Consensus) 문화’를 싹틔웠고, 철저한 ‘고객 중심 경영’을 표방했다.

우리나라 기업의 활동 지평을 세계로 확장시키는 데 앞장선 것도 구자경 명예회장의 업적이다. 재임기간 동안 50여 개의 해외법인을 설립하였는데, 특히 1982년 미국 알라바마 주의 헌츠빌에 세운 컬러TV공장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설립한 해외 생산기지였다.

해외투자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의 지멘스,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갑작스런 선친의 타계로 2대 회장이 된 구자경 회장은 오랜 기간 현장에서 쌓은 역량과 자신감을 십분 발휘했다. ‘과연 거대한 그룹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라는 주변의 우려를 무색하게 했다. LG를 세계적 기업으로 일궜다.

그렇지만, 선친의 갑작스런 타계로 경영권 승계 준비에 대한 아쉬움이 있던 구자경 회장은 “70세가 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생전의 구자경 명예회장과 장남 구본무 회장

그리고 실제로 70세가 되던 1995년 2월 장남 구본무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함으로써 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라는 의미 있는 선례를 만들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장남 구본무도 1975년부터 20년 동안 그룹 내 여러 현장을 두루 거치면서 후계자 수업을 받게 했다. 변함없이 적용된 장자 승계 원칙과 혹독한 후계자 수업은 조용하면서도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의 비결이었다.

은퇴 후 구자경은 평소 갖고 있던 소박한 꿈이었던 분재와 난 가꾸기, 버섯 연구에 정성을 기울이는 등 회사생활 50년 만에 맞은 자유인의 삶을 자연 속에서 보냈다.

평소 생명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의 꿈을 향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하곤 했던 그는 이러한 생각을 실천하듯 경영자의 삶에서 은퇴한 이후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아왔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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