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경 LG 명예회장 '노블리스 오블리주', 아들 넷 '병장 만기 제대'...정주영 현대 창업주와 '각별한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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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경 LG 명예회장 '노블리스 오블리주', 아들 넷 '병장 만기 제대'...정주영 현대 창업주와 '각별한 우정'
  • 박근우 기자
  • 승인 2019.12.17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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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살 차이지만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과 아산 정주영 현대 창업주는 각별한 사이
- 엄격한 책임과 의무, 구본무 구본능 구본준 구본식 4명의 아들 모두 병장 만기 제대

고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유족들이 서울아산병원을 택한 이유가 정주영 회장과의 인연 때문으로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또 구자경 명예회장의 아들 넷 모두가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일이 '노블리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로 회자되고 있다.

지난 14일 향년 94세로 별세한 구자경 명예회장의 4일장을 마칠 때까지 구자경 명예회장의 유족들은 빈소를 따로 밝히지 않았다. 빈소뿐 아니라 화장 후 장지까지 비공개했다. 

17일 LG 측에 따르면 "17일 오전 고 구자경 명예회장 발인이 별도의 영결식 없이 비공개로 간소하게 치루어질 예정"이라며 "운구차로 구 명예회장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은 저희 홍보팀에서 촬영 후 전달해드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모든 장례 일정이 마지막까지 차분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현장 취재 및 촬영을 자제해 주시면 더없이 고맙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LG 측은 언론에도 사진 및 취재 마저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할 정도인 셈이다. 이는 소박하고 단출한 장례를 원했던 고인의 유지를 따르기 위해 가족장을 고집하는 LG 가문의 뚝심이라는 평가다.  

그런데 LG가는 왜 서울아산병원에 장례식장을 마련했을까? 

상남(上南) 구자경 명예회장보다 한 해 먼저 세상을 떠난 장남 구본무 LG 3대 회장을 비롯해 구 명예회장의 부인상 등 LG가가 서울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을 빈소로 택한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기 때문. 

1987년 2월, 전경련 회장을 맡게 된 당시 구자경 회장이 전임 정주영 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 및 중앙일보에 따르면 상주를 맡은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을 비롯한 유족은 고인이 세상을 떠난 지난 14일, 서울아산병원 측에 전화를 걸었다. 구본능 회장은 구광모 LG 회장의 친아버지다. 고 구본무 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LG그룹 총수 일가가 고인의 빈소로 서울아산병원을 택한 이유로는 생전 고인과 아산 정주영 현대 창업주 간 각별한 관계가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21년 전인 1988년, 재계 수장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서 10년 재직을 마치고 당시 구자경 럭키금성그룹(현 LG) 회장에게 자리를 넘겼다. 

당시 재계에선 2년씩 다섯 차례에 걸쳐 전경련 회장을 역임한 아산 정주영 회장의 뒤를 이어 누가 재계 수장을 맡을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아산의 생각은 분명했다. 1985년 2월 정주영 회장은 전경련 회장직 4연임을 시작하면서 아예 차기 회장을 상남 구자경 회장으로 미리 점찍었다.

정주영 회장은 당시 전경련 회장단에게 “다음 회장은 구자경 회장이 하면 무탈할 겁니다”라고 밝혔다.

생전의 구자경 LG 명예회장과 장남 구본무 회장

구자경 명예회장이 1925년 4월생, 정주영 창업주는 1915년생으로 나이 차이가 10세나 됐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이가 각별했다. 외향적인 아산과 실용주의적 성품의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은 서로 성격은 달랐지만, 솔직담백하면서 잔정이 많다는 공통점에서 서로를 아껴줬다는 것. 

아산 정주영 회장의 6남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은 지난 15일 조문을 마치고 취재진에게 “생전에 고인이 부친과 가깝게 지내셨다"며 "현대의 서산 간척지 공사 현장에 고인이 찾아오셨을 당시 찍은 사진을 구광모 대표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검정 뿔테안경에 진한 경상도 사투리는 상남의 솔직하면서도 소탈한 성품을 그대로 나타낸다는 평가다.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집무실에는 ‘사람은 모름지기 누가 안 보고 혼자 있을 때도 항상 처신을 바로 해야 한다’는 뜻의 ‘신독’(愼獨-君子必愼其獨也의 줄임말)이라고 쓴 휘호를 걸어놨다. 이는 LG가 내세우는 '정도경영'의 밑바탕이 됐다.

6·29 선언 직후 여소야대 정국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어수선했던 1988년, 전경련 회장이었던 고인이 “자유경제 체제를 수호하는 정당에만 정치자금을 후원하겠다”고 발언한 이유도 정치 민주화와는 별개로 시장경제 자체가 흔들려선 안 된다는 소신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진다.

구자경 명예회장의 75세 생일 당시 LG가 가족 사진

구자경 명예회장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삶을 추구했다. 고인의 장남인 고 구본무 회장, 차남 구본능 희성 회장, 3남 구본준 LG 고문, 4남 구본식 LT 그룹 회장 등 아들 4명 모두 육군 만기 병장으로 제대했다. 이는 LG 총수 일가에서 병역 문제가 지금껏 발생하지 않은 이유로 꼽힌다.

LG는 구자경 명예회장이 취임했던 1970년 매출 260억원에서 퇴임한 해인 1995년 30조원 규모로 약 1150배 커졌다. 임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5배 증가했다. 1988년에는 국내 최초로 서울 우면동에 기업 중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재임 기간 중 70여개의 연구소를 세웠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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