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의 '돼지들에게', 13년전 문단 내 성추행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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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의 '돼지들에게', 13년전 문단 내 성추행 폭로
  • 백성요 기자
  • 승인 2018.02.07 14: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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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비판한 '괴물'보다 앞서 문단 내 악습 폭로..."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 언젠가 몹시 흐리고 피곤한 오후 /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 /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 (중략) / 그 날 이후 열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 / (중략) /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 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 어느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돼지들에게> 최영미 (2005)

 

최영미 시인이 지난 2005년 발표한 '돼지들에게'라는 시가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해 최영미 시인이 발표한 '괴물'이라는 시가 최근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폭로 사건과 맞물려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최 시인은 13년 전 발표했던 '돼지들에게'에서 이미 문단 내 만연한 성범죄에 대한 경고를 보낸 셈이다. 

최영미 시인의 2005년作 '돼지들에게'

'돼지들에게'에서 최영미 시인은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 언젠가 몹시 흐리고 피곤한 오후 /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 /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 (중략) / 그 날 이후 열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라고 전했다. 

이어 "그들은 내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 우리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 "진주를 줘." / "내게도 진주를 줘." / "진주를 내놔." / 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레 요구했다 /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 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 어느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 (예전보다 더 못생긴 진주였다)"고 표현했다. 

후반부에는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 때로 싸우고 타협했다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고 절규했다. 

당시 최영미 시인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시에 등장하는 '돼지'는 한 사람이 아니다(그래서 제목도 '돼지들'이 됐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최영미 시인은 시집 '돼지들에게' 1부에서 표제작인 '돼지들에게'가 포함된 연작 '돼지와 진주'로 구성돼 있다. 

등장 인물들은 돼지, 여우, 늑대 등으로 표현됐고, 최영미 시인은 이들이 우리 사회의 위선적인 지식인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돼지의 변신'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 그는 여우가 되었다 / (중략) /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 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 / 변치 않을 오래된 역설이...나는 슬프다"라는 내용이다. 

앞서 최영미 시인은 지난해 12월 국내 유명 원로 시인을 사실상 실명으로 비판한 것이나 다름없는 '괴물' 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괴물'에서는 성범죄 가해자를 'En'으로 표현해 대부분의 사람이 시인이 지목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최근 성추행, 성폭행 관련 폭로를 용기있게 이어가는 '미 투(Mee Too)'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문단 내 만연한 성폭력을 폭로하는 최영미 시인의 시는 앞으로도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최영미 시인의 '돼지들에게' 다. 

<돼지들에게>  최영미, 2005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외딴 섬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 집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 
내가 태어나 바다의 신비를 닮은 
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앞이 안 보일 만큼 어두웠기에
나는 그가 돼지인지도 몰랐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주머니가 털렸다는 것만 희미하게 알아챘을 뿐.

그날 이후 열 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
내가 못 들은 척 외면하면
그들은 내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우리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진주를 줘 내게도 진주를 줘 진주를 내놔."
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레 요구했다.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어느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예전보다 더 못생긴 진주였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스무 마리의 살찐 돼지들이 대문 앞에 나타났다.
늑대와 여우를 데리고 사나운 짐승의 무리들이 담을 넘어
마당의 꽃밭을 짓밟고 화분을 엎고,
내가 아끼는 봉선화의 여린 가지를 꺾었다.
어떤 놈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인 없는 꽃밭에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리고 힘센 돼지들이 앞장서서 부엌문을 부수고 들어와
비 오는 날을 대비해 내가 비축해놓은
빵을 뜯고 포도주를 비웠다.
달콤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파티는 계속되었다.
어린 늑대들은 잔인했고,
세상사에 통달한 늙은 여우들은 교활했다.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때로 싸우고 타협했다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도망쳤다.
나는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기차를 타고 배에 올랐다.
그들이 보낸 편지를 찢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 탐욕스런 돼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달라고……

 

 

백성요 기자  lycaon@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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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봉 2018-02-07 19:26:55
남의 시를 이렇게 옮겨도 되는지요? 작가에게 허락은 구하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