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미드나잇’은 무슨 색일까요?…외래어로 도배된 삼성·LG 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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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미드나잇’은 무슨 색일까요?…외래어로 도배된 삼성·LG 가전
  • 우연주 기자
  • 승인 2023.08.18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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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그대로, 언어만 바꿔 치장한 ‘눈속임’
의미 함축을 위해 외래어 필수인 경우도
소비자가 의식적으로 행동해야 개선될 것
삼성과 LG 홈페이지 내 상세페이지에 사용된 외래어 예시. [구성=우연주 기자]
삼성·LG 홈페이지 내 상세페이지에 사용된 외래어 예시. [구성=우연주 기자]

누구나 생활에 필요한 가전제품이지만 상세페이지 내 지나친 외래어 사용으로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인과 해결책을 알아봤다.

18일 <녹색경제신문>의 취재 결과 ‘냉장고’ 하나를 설명하는 데에도 스무 개 이상의 외래어가 쓰였다. 제품명이나 과학적 현상과 같이 외래어가 불가피하게 필요한 경우는 제외했다.

LG전자 홈페이지의 냉장고 상세 페이지에 나오는 ‘맨해튼 미드나잇’, ‘보타닉’, ‘샌드’라는 단어는 색상명이다. 각각 검정에 가까운 짙은 회색, 채도가 낮은 초록색, 연한 갈색을 가리키지만 이름만 들어서는 무슨 색인지 알 수 없다. 기억하기 힘든 것은 물론이다. ‘크래프트 아이스’는 ‘얼음 제조’라는 뜻이고, ‘케어솔루션 매니저’는 관리·해결 담당자다.

삼성전자의 가전제품 설명도 비슷한 실정이다. 무선 청소기 설명에 나온 ‘3D 뎁스 카메라’는 3차원으로 깊이 있게 공간을 인식하는 카메라고, ‘엉킴 방지 그라인더’의 ‘그라인더’는 ‘분쇄기’를 말한다. ‘맵’은 지도, ‘펫’은 반려 동물, ‘음성 컨트롤’은 음성으로 기기를 관리할 수 있는 기능을 의미한다.

가전제품의 설명에서 외래어 사용 빈도가 잦아지면서 소비자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한 60대 소비자는 “가전제품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용하는 제품인데 나는 영어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인터넷은 쓸 줄 알아도 온라인에서 가전제품을 고를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한 40대 소비자도 “학교 다닐 때 영어 공부 안 한 탓인지, 우리말로 적혀 있는 것 같지만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가전 제품 설명이 많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외래어 남용은 ‘눈속임’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형배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은 본지에 “제품의 본질은 바뀌지 않은 채 사용 언어만 우리말에서 외래어나 외국어로 바꾸는 것을 ‘언어적 포장’이라고 말한다”며 “낯선 용어를 사용한 과대포장에 가깝다. 일종의 눈속임”이라고 말했다.

영어만으로 표현 가능한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김가은 동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복잡하고 미묘한 뉘앙스를 함축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영어 단어의 특성이 영어 사용 증가세에 기여했을 것”이라며 “예를 들어 삼성 전자제품의 시그니처 브랜드인 비스포크(bespoke)는 ‘특정인을 위해 맞춤식으로 특별히 제작된’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을 수 있는 한국어로 대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세계화 추세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김 교수는 “세계 많은 지역에서 영어는 공통어로 쓰이기 때문에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일환으로 제품명이나 기능, 색상 등을 영어로 표준화하여 사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화’가 경제 논리라고 본다면, 경제 논리로 외래어 사용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김 학예연구관은 “세계화는 국제무대에서 함께 교류하는 것”이라며 “우리 언어 안에서 외국어와 외래어를 남용하는 것을 세계화라고 볼 수 없다. 우리 내부에서 소통할 때 외래어나 외국어를 쓴다고 해서 외국인과 의사소통이 자유로와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결국엔 소비자의 몫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김 학예연구관은 “마치 기업이 주도해서 새로운 언어현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지만 순환작용에 가깝다”며 “소비자가 외래어 사용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면 제품 구매가 줄어들 것이고, 다음 단계에서는 기업도 자제하게 된다. 하지만 외래어를 많이 썼을 때 소비자 반응이 좋다면 계속 외래어 사용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언어 사용자 모두가 보다 의식적으로 행위할 때 가능하다. 김 학예연구관은 “각 개인이 적극적으로 잘못되거나 과도한 외래어 사용을 거부했을 때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도 다양한 소비자 특성과 언어의 본질을 고려했을 때 지나친 외래어 사용은 피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그는 “영어 사용 경향성이 증가하는 추세는 글로벌 시대에 피할 수 없는 트렌드일 것”이라면서도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이 의사소통임을 상기해 볼 때, 의사소통 주체간의 명확한 이해를 저해하는 과도한 영어 사용은 지양되어야 하며 충분히 한국어로 대체할 수 있는 부분은 한국어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했다.

우연주 기자  lycaon@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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