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역사… 「도전과 응전 대한민국 건국에서 6·25전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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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역사… 「도전과 응전 대한민국 건국에서 6·25전쟁까지
  • 조원영
  • 승인 2016.07.0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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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학 전문가 김충남

21세기경영인클럽(회장 김동욱 전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서울 중구 플라자 호텔에서 대통령학 전문가 김충남 한국 군사문화연구원 연구위원을 초청, 「대한민국 건국에서 6·25전쟁까지」를 주제로 조찬회를 진행했다. 강연 내용을 요약했다.

심각한 현대사 인식문제

국가는 역사 공동체이기 때문에 국민은 공통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역사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야 국가가 유지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국가발전에 성공했으면서도 부정적 역사인식이 팽배하며, 그러한 역사인식을 학교에서 가르쳐 왔고, 심지어 정권 차원에서 역사청산을 시도하기도 했다. 모든 나라들이 자국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교육하는 것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그 결과 보수와 진보, 그리고 세대 간의 현저한 역사인식 차이를 초래했으며, 그 것이 사회정치적 갈등과 세대 간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 되어 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1국가 2국민」 현상이 존재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이러한 역사인식의 혼란은 첨예한 남북 체제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4년 전 역사연구소가 「백년전쟁」이란 명칭의 동영상을 펴낸 적이 있다. 이 동영상은 100년 전 시작된 친일반민족 세력과 민족자주 세력 간의 역사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친일반민족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 이완용과 더불어 이승만과 박정희를 내세운 반면 민족자주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 안중근, 김구 등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현대사 70년 중 30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오늘의 한국 기초를 마련한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친일반민족의 역사로 해석한다면 대한민국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박근혜 정부는 이 같은 비정상을 정상화하기 위해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찬성과 반대가 팽팽히 맞서 있고, 국회의 다수를 차지한 야당이 이를 저지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 교과서 시안이 나오면 역사논쟁이 다시 뜨거워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국가의 「기본 중의 기본」인 역사인식의 혼란을 계속 방치해야 할 것인가?

국가 정체성 확립 필요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사람이 원만한 삶을 살기 어렵듯이 다수 국민의 국가 정체성(sense of national identity)이 불분명한 나라는 안정되고 발전하는 나라가 되기 어렵다.

국가 정체성이란 국민이 ①국가의 일원이라는 소속감, ②국가에 대한 자긍심, ③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포함한다. 그 같은 국가 정체성은 올바른 역사인식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국가정체성 위기가 우리사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라는 것이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는 문항에 35%가 부정하고 있고 젊은 층의 부정하는 비율은 훨씬 더 높다.

「자유민주 체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문항에 절반이상(53%)이 부정하고 있고, 대학생 중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을 택하겠다」는 문항에 57%가 부정하고 있다.

또한 「전쟁이 나면 싸우겠다」고 응답한 청소년은 12%에 불과하고, 「북한과 미국이 싸우면 북한편을 들겠다」고 한 비율이 3분의 2가 넘는다.

그래서 한국인의 국가만족도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신채호는 “애국심을 기르려면 먼저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그렇게 가르쳐 왔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같은 사물도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색안경을 끼고 보면 역사가 다르게 보이게 된다.

그런데 굴절된 색안경을 끼고 현대사를 왜곡되게 해석하고 나아가 그것이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국사 학계의 주류가 되고 있다.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역사관으로 민족사관, 민주사관, 민중사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사관은 한국은 분단된 나라일 뿐 아니라 반민족적 친일세력이 주도해 온 나라이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다고 보며, 분단 극복을 최고 목표로 인식하고 민족의 일부인 북한과 무조건 화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인는 현대사를 국가건설(nation building) 사관에 입각하여 종합적으로 해석한다. 토인비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해야 한다고 했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야말로 숱한 도전에 대한 성공적인 응전의 역사였다.

그것은 공산 도발을 막아내면서 맨주먹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역사다. 국가건설이란 근대국가의 기본 인프라를 구축하는 과정이며, 핵심적인 국가인프라는 국내외 안전(security), 경제적 기반(economy), 민주적 질서(democracy)로 볼 수 있다.

최악의 여건에 처해 있었던 신생 대한민국이 3대 인프라를 한꺼번에 구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시급한 것부터, 즉 국가안보, 경제발전, 민주발전의 순서로 단계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에 어느 신생국보다 국가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남북한 건국 과정의 진실

대한민국 건국과 관련된 주된 논란은 이승만 박사가 단독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분단을 고착했다며 그를 비난하는 한편,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건국 지도자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건국을 반대했던 지도자는 오히려 존경받는 역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한국은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친일 세력이 주도적 역할을 해 왔던 반면 북한에서는 친일 세력을 철저히 청산했기 때문에 남한보다 정통성이 더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단독정부를 먼저 세운 것은 북한이고, 북한의 친일파 청산도 철저했던 것이 아니다.

북한의 독자정권 수립은 남한보다 2년 반 앞섰다. 소련군의 북한 점령 직후인 1945년 9월20일 스탈린은 북한에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스탈린은 절대 독재자였기 때문에 그의 지시는 반드시 실현되어야 했다.

그래서 4개월 후인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에 따라 소비에트식 행정조직과 공안기관이 설치되고 토지개혁, 중앙은행 설립 및 독자적 화폐 발행, 모든 생산시설과 금융기관 국유화 등 강력한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중대한 조치들을 단행했다.

뒤이어 11월에는 인민위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다음 해 2월에는 정식 인민위원회가 발족됨으로써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완료되었다. 1948년 2월에는 북한군이 공식 창설되었는데, 군대 창설은 정부 수립 이후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북한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 주고 있다.

건국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헌법 제정이다. 북한은 1947년 9월 헌법 제정에 착수하여 1948년 2월초 헌법 제정을 완료하고 4월에 헌법안에 대해 스탈린의 승인을 받았으며, 통일정부 수립 협상을 위해 김구가 평양에 머물고 있을 당시인 5월에는 북한의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채택했다.

한반도 통일정부를 세울 생각이 있었다면 북한이 이 같은 일방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비해 남한에서는 제헌 국회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가 1948년 5월에 있었고 6월 초 헌법 제정에 착수하여 7월 중순 헌법 제정을 완료했다.

2차대전 후 소련군이 점령한 국가는 모두 공산 위성국이 되었으며, 그것도 북한에서와 똑 같은 방식으로 공산 정권이 수립되었다. 따라서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은 남북한 대표 간의 협상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남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친일 세력이 주도했다는 것도 과장된 주장이다. 5·10선거 당시 선거법은 친일 인사의 피선거권과 선거권을 제한했기 때문에 친일 인사는 한 명도 국회에 진출하지 못했고 초대 내각도 항일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비해 북한 정권에는 친일 활동을 한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생명체는 출생 직후가 가장 취약하듯 건국 직후의 대한민국은 내우외환으로 생존마저 불확실했다. 파탄된 경제로 인해 세금을 거둘 수 없었고 경험 있는 인재도 없었다. 그 결과 국방력과 치안력은 물론이고 행정력도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4·3사건 이래 제주도에서는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고, 이를 평정하러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동조하여 4연대와 6연대에서도 소규모 반란이 잇따랐다.

1949년 5월 초에는 춘천 주둔 8사단의 2개 대대가 대대장 인솔 하에 월북했고, 5일 후에는 해군 경비정 한 척이 북으로 넘어갔다. 국가 최후의 보루라는 군대까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미군이 1949년 6월 말까지 완전히 철수하면서 대한민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한 가운데 국회가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통과시키면서 일제 출신이 많았던 군대와 경찰이 동요했다.
그럼에도 이승만 정부는 단호한 반공정책으로 공산화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공산당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군대와 행정부와 학교, 그리고 각계각층에 침투해 있던 공산 분자들을 색출했다.

예를 들면, 미군으로부터 인계받은 5만 명의 국방경비대 중 5천 명 가까이 제거했고 5천여 명은 스스로 도망갔다. 그리고 전국 산악 지역에서 준동하고 있던 빨치산을 소탕하는 데도 성공했다.

1948년 말부터 1949년에 걸쳐 정부가 공산 세력과 생사를 건 투쟁을 하고 있었고 또한 각계에 침투해 있던 공산 분자들을 색출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친일 분자 처벌에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나 철저히 제거할 형편도 못 되었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었지 친일파 청산이 아니었다. 군대와 경찰에서 일제 경력자들을 제거했다면 공산 세력과의 투쟁에서 실패했을 지도 모른다.

이승만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최악 조건 하에서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필요한 법률과 제도를 마련했다.

또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가장 중요한 개혁이라 할 수 있는 농지개혁과 6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해방 당시 인구의 과반수가 지주에 예속된 소작농 또는 반소작농이었고, 인구의 78%가 문맹자였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두고는 민주주의는 커녕 국가의 장래가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1949년에 단행된 농지개혁으로 농민들이 토지를 가지게 되면서 공산 세력의 선전에 더 이상 현혹되지 않았고, 의무교육 실시도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휴전 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1960년에는 95%의 학령 아동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농지개혁과 의무교육 실시는 한국을 현대국가로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혁명적 조치였다.

6·25전쟁의 교훈

6·25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와 국군의 대응에 대해 비판이 적지 않지만, 사실은 그만큼 한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과 경제력에 달렸지만 한국은 북한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46년 초 정부를 수립한 북한은 5년에 걸쳐 공산동원 체제를 이용하여 전쟁 준비를 할 수 있었고, 또한 소련과 중국이 북한군 증강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6·25 발발 당시 북한군은 아시아 최강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은 건국한 지 1년 반 밖에 안 되었고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빨치산 준동 등 좌익·공산 세력의 도전에 대응하는 데 급급해 왔다. 스스로 군사력을 증강할 수 있는 재정 형편이 못 되었고 미국도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여 지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은 독수리와 새매 간의 싸움처럼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공산 세력의 목표는 혁명이나 전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공산독재 체제를 건설하는 것이다. 북한 독재자 김일성의 목표는 적화통일이었고 그래서 그는 북한 정권 수립 경축 연설을 통해 「국토완정」(國土完整)을 주장했고 다음 해 신년사에서는 국토완정을 무려 13번이나 강조했다.

그리고 3월에는 스탈린을 찾아 가 남침계획을 승인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스탈린의 동의를 얻지 못 했다. 그러나 이 때 소련은 북한과의 비밀군사협정을 통해 탱크 200대, 군용기 180대, 수천 문의 야포 등을 북한에 제공했다. 전쟁을 예상하지 않고는 스탈린이 그처럼 엄청난 규모의 공격용 무기들을 제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오쩌둥도 공산통일이 마지막 단계에 이른 1949년 여름부터 다음 해 초 사이에 오랜 항일전과 국공내전을 통해 단련된 중공군 소속 조선인 3개 사단을 통째로 북한에 넘겨 주었다. 그리고 소련 군사 고문단은 북한의 남침계획까지 작성해 주었다.

위대한 국민만이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위대한 국민이란 위대한 정신을 가진 국민이며, 그러한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올바른 역사관이다.

따라서 역사인식 혼란의 문제는 국사 학자들에게 일임할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기 위한 국민적 각성운동에 우리 모두가 동참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유엔이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고 그 연장선 상에서 6·25전쟁에 유엔군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을 지켜 냈다는 사실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늘의 한국 기반은 1950년대에 구축되었다. 건국과 전쟁 같은 어려운 시기에 어떤 지도자를 갖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달라진다.

한국은 최악의 상황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승만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가졌다는 점에서 행운이었다.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이승만은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공산주의의 모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공산 세력의 도전과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나라를 수호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탁월한 전략적 판단력과 외교적 수완으로 미국으로부터 방위조약을 쟁취하여 대한민국의 생존을 보장한 것은 물론 경제발전과 민주발전도 가능하게 했다.

오늘의 한국을 만드는데 박정희의 공로가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승만 없이 박정희는 없었다고 본다. 왜냐 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구축한 기반(한미동맹, 70만 대군, 농지개혁, 의무교육 등) 위에서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원영  jwyc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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