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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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이야기
  • 편집부
  • 승인 2015.03.1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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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의 계절입니다.

세한삼우(歲寒三友 :松竹梅) 또는 사군자(四君子: 梅蘭菊竹)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매화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화꽃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뜰에 핀 매화가 아니라 화투장의 꽃에 더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매화는 상상의 꽃으로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 있는 매화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닙니다. 몇 년 전 아는 도예가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는 주전자에 물을 넣고 끓이면서 뒷문을 열고 나가더니 하얀 매화꽃을 손으로 훑어 쥐고 돌아왔습니다. 찻잔에 끓은 물을 붓더니 매화 꽃 몇 송이를 그 위에 떨어뜨리면서 나에게 잔을 내밀었습니다.
“드세요.”
좀 황당한 기분을 갖고 찻잔에 입을 대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코를 찔렀습니다. “향기가 코를 찌른다.”는 표현을 그때 실감했습니다.

당나라의 황벽선사가 남긴 게송(부처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
“찬 기운이 한 번 뼛속을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매화가 코 찌르는 향기를 얻었으리오.”
선(禪)을 공부하는 제자를 격려하려고 지은 시구인 듯한데, 인간사의 비유법으로 다양하게 인용될 수 있어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매화 향기를 실제로 경험한 후에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매화가 동시에 나의 시각과 후각을 사로잡는 것을 느낍니다.

 
며칠 전 제주도 대정읍에 있는 ‘노리매’라는 이름의 매화 동산을 구경했습니다. 약 2만 평의 매화 동산에는 130종 1,000그루의 매화 나무에 꽃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꽃 색깔도 흰색에서 분홍색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뤘고, 나무 모양도 무뚝뚝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고목 매화가 있는가 하면 가냘프면서도 나긋나긋한 능수매화도 치렁치렁 꽃을 피웠습니다. 매화꽃이 노랗게 익은 하귤(夏橘)과 어울리며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정감을 물씬 풍겼습니다.

매화 동산 알림판에서 매화에 얽힌 퇴계 이황(李滉)의 러브 스토리를 읽었습니다. 퇴계는 매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합니다. 매화를 소재로 85편의 시문을 지었다고 하니 그의 매화 사랑을 짐작하고 남습니다.

퇴계가 48세에 단양 군수로 부임했는데, 그곳에서 18세의 관기 두향(杜香)을 만나게 됩니다. 퇴계는 시문에 능하고 가야금을 잘 타며 매화를 좋아하는 두향에게 반해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퇴계는 9개월 후 풍기 군수로 발령을 받고 단양을 떠나야 했습니다. 헤어지기 전날 밤 퇴계와 두향은 이별의 아픔을 시문으로 나누며 애달파 했다고 합니다.

단양을 떠나는 퇴계의 짐 속에는 두향이가 애지중지 가꾸던 매화 화분이 들어 있었습니다. 퇴계가 69세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서로 잊지 못했습니다. 퇴계는 두향이 준 매화를 죽는 날까지 곁에 두며 보았고, 두향은 퇴계가 타계하자 생전에 그와 함께 자주 가서 대화를 나누었던 남한강 거북바위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노리매의 주인 김동규 씨는 아스콘 사업으로 돈을 벌며 15년 동안 이 매화 동산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그는 젊은 날부터 매화꽃을 좋아해서 제주도의 곳곳에 있는 고목 매화를 찾아다니는 매화 마니아였습니다. 처음 분재를 즐기다가 사업으로 돈을 벌자 매화 동산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보아 둔 매화가 있는 땅이 개발지가 되면 그는 땅 주인을 찾아가 매화나무를 사들였습니다.

 
그는 매화를 찾아 전국을 누볐습니다. 마음에 드는 매화나무를 보면 무리한 가격도 마다 않고 사들였습니다. 수송비를 아끼기 위해 거의 등걸만 남기고 가지를 다 쳐낸 후 제주도로 운반해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든 매화 동산을 3년 전부터 개방하여 제주도의 봄 명소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바위를 부수어 자갈과 모래를 만드는 아스콘 사업가이지만 매화꽃엔 약하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꽃구경을 왔으면 구경만 할 것이지 왜 매화꽃 가지를 목에 두르고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습니다. 입장객이 꽃을 함부로 만질 때마다 내 몸이 꼬집히는 것처럼 마음이 아픕니다.”

고등학교 때 이름 정도만 알았던 동창생이 50년 후 매화 동산 주인이 되어 내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돌을 부수는 거친 사업가인 줄만 알았던 그가 사람들이 꽃에 손을 대면 마음이 아파 안절부절못하는 ‘꽃바보’가 된 것을 보았습니다.

매화 동산에서 퇴계의 러브 스토리를 알았고, 옛 고교 동창생의 매화 사랑 이야기를 알게 되어 기분 좋은 3월입니다.
 

김수종=한국일보에서 30년 간 기자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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