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성에서
상태바
오사카성에서
  • 조원영
  • 승인 2015.03.02 16: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의경                           신산업경영원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출병시킨 왜병 16만 명은 규슈의 나고야를 떠나 하룻만에 부산포에 도착하고, 다시 20일이 채 안 되어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을 점령했다.

우둔한 임금 선조(宣祖)는 이에 앞서 1592년 4월29일 의주로 도망 길에 올랐다. 세자와 영의정 이산해를 비롯 100여 명을 데리고 북으로 향해 파주 임진 나루에 도착했을 때 칠흑같은 밤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져 한 치 앞을 나갈 수 없었다.

이 때 벼랑 위에서 큰 불빛이 일어나 임진강의 험한 물길을 환히 밝혀 주었다. 8년 전 저세상으로 떠난 이율곡(李栗谷)이 생전에 화석정(花石亭) 기둥․대들보에 기름칠을 해 두었던 것을 이 날 마을 사람들이 어가(御駕)를 돕기 위해 불을 붙인 것이다.

임금은 강을 건너 탄식했다. 『이같은 선지자(先知者)인 충신의 말을 내가 왜 안들었던고…』 우둔한 사람은 일을 당해야 깨닫기 마련이다.

도요토미는 1585년 일본 막부(幕府)의 수장이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집권한 그는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을 평정하여 통일 국가를 이룩했다.

그는 오사카 출신으로 오사카성(大阪城)을 새로 쌓고 전국을 호령했다. 오사카성의 사령탑인 천수각(天守閣)은 높이가 54.8m에 이르고 화려한 위용을 갖춰 천하를 위압하려는 의도를 반영했다.

지난달 필자는 성 안의 천수각을 돌아 보았다. 이 성주로 인해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수난(受難)을 겪었는 지를 생각하면서….

도요토미가 집권한 후 정세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조선 조정에선 사절단을 파견했다. 정사(正使) 황윤길과 부사(副使) 김성일이 임금의 친서를 도요토미에게 전하고 그의 거동을 면밀히 살펴 보았다.

외교(外交)란 면전에선 그럴 듯한 얘기를 덕담(德談) 삼아 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건 그 인물의 저의(底意)이다. 이 때 귀국한 사절단 중 정사 황 씨는 도요토미의 눈이 빛나고 야욕이 가득하므로 대비해야 한다고 했으나, 부사 김 씨는 잔나비 같은 용모로 보잘 것 없는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선조 임금과 조정 신하들은 그들의 막연한 희망을 섞어 후자의 의견을 받아 들였다. 그에 앞서 임진란(壬辰亂) 8년 전에 별세한 이율곡은 일본에 대비하기 위해 10만 명의 군사를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양 2만 명을 비롯하여 전국 8도에 1만 명씩 할당 계획까지 보고했으나, 공연히 민심을 어지럽혀 화를 키우는 소리(양화론, 養禍論)라며 조정은 이를 봉쇄했다.

이 때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선조가 받아 들였어도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치밀한 도요토미는 당시 조선 사정 파악을 위해 간첩들을 부단히 파견했고, 이같은 무방비 상태가 그대로 침략 계획에 반영됐던 것이다.

또 전란이 벌어졌더라도 새로 보충된 10만 명의 병력이 있었다면 그처럼 패배하여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강토를 잿더미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명 나라의 5만 원군이 참전했다고는 하지만 끝까지 싸워 왜군을 몰아낸 것은 의병(義兵)들이었다.
의병들이 누구인가. 초야에 묻혀 있던 선비와 무능한 정부의 학정(虐政)으로 고생하던 서민들. 그리고 산 속에 살던 중들이었다. 이들은 임금의 덕을 못 본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일어나 지배층의 무능과 방치로 인해 벌어진 전쟁의 일선에서 몸을 던져 의롭게 죽어 갔다. 이들을 10년 전 무장시키기만 했어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다.

이 것은 400년 전에 끝난 역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역사책 1페이지를 접고 잊으면 그만이다. 아직도 우리 나라 지도자들의 정신과 판단력이 그 시절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될 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이다.
그 후 20세기의 식민지배를 받던 때나, 해방 후 독립된 국가를 운영해 오면서 숱한 아쉬움이 남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제나 이제나 한민족의 진로(進路)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은 백성들의 자각과 행동이었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성 천수각에 높이 앉아 조선을 손아귀에 집어 넣으려 했을 때도 그러했고, 탈식민지 독립운동이 그러했으며, 6․25 전쟁과 그 후 산업화 ․ 민주화를 달성할 때도 그러했다.
올해 안에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돌파하리란 예상이다.

그러면 일본과 나란해지고, 내년 이후엔 한국이 앞서 갈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한국인들의 지혜와 용기가 빚어 낸 현실(現實)이다.

그리고 그 힘은 기층(基層) 백성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원영  jwycp@hanmail.net

▶ 기사제보 : pol@greened.kr(기사화될 경우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 녹색경제신문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