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문화 기적(下)] '이건희 컬렉션' 기증, 잇단 '문화 기부' 기폭제...'미술품 물납제' 필요한 이유
상태바
[이건희 문화 기적(下)] '이건희 컬렉션' 기증, 잇단 '문화 기부' 기폭제...'미술품 물납제' 필요한 이유
  • 박근우 기자
  • 승인 2021.05.10 23: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서세옥, 최만린 등 유족들, 지방 미술관에 잇단 기증...'이건희 컬렉션' 기부 영향 받아
- 문화계, '문화 기부’ 활성화를 위한 인센티브 개발이나 제도적 장치 강화 돼야
- 간송 전형필 선생 별세 이후 물납제 제기...'한국판 테이크 모던' 국립 이건희미술관 세워지나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문화 기부는 ‘세기의 기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고(故) 이건희 회장 유족들이 기증을 결정한 국보급 문화재와 근현대 거장들의 작품 규모는 무려 2만3000여점에 이른다. 특히 이번 기부는 지방 출신 유명 작가 연고지 미술관도 알뜰히 챙겼다는 점이다. 지방의 문화 자부심 확산은 물론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썩인다. <녹색경제신문>은 ‘이건희 문화 기부’가 나비효과가 되어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드는 현상을 심층 취재해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이건희 컬렉션’ 기증은 우리나라에 ‘문화 기부’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최근 한국화 거장 서세옥 화백, 한국 추상 조각의 대가 최만린 선생의 대표작이 대거 국·공립미술관에 기증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가(家) 유족들이 미술품을 기증한 것처럼 한국 미술계 거인들을 기리는 유족 측의 결정이 기증 문화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수묵 추상의 개척자 서세옥 화백은 지난해 11월 별세했다. 유족들은 지난달 그림 100여점을 국립현대미술관(14점)과 고향의 대구미술관(90점)에 기증했다. 기증 작품의 가치는 수십억원 수준이다. 지난달 경매에서 그림 한 점이 1억6000만원에 낙찰될 정도였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1세대 조각가인 최만린 선생도 지난해 11월 별세했다. 최 선생의 조각 및 드로잉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20점), 대구미술관(58점)에 기증됐다. 아들 최아사 계원예대 교수는 한 매체에 “기증은 고인을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라고 전했다.

대구미술관에는 최근 변종하 화가의 ‘수련’ 연작을 기증한 남성희 대구보건대 총장, 서진달 화가의 회화 작품을 기증한 인척 최철명씨 등 개인 소장가의 기증 사례도 이어졌다.

또한 지난해 12월 별세한 서양화가 김영덕 화백의 유족들도 최근 그림 9점을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 의사를 밝혀 현재 절차가 진행 중이다. 김 화백은 6·25전쟁의 비극을 헐벗은 아이들로 형상화한 그림 ‘전장의 아이들’로 유명한 화가다. 이번 기증 목록에도 정물화 ‘건어(乾魚)’ 등 당대 분위기를 일별할 수 있는 작품이 담겼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최근 전남도립미술관 개관을 기념해 서예가 손재형의 글씨, 시인 김지하의 난초 그림 등을 기증했다. 미술관측은 감사패를 전달했다.

문화계에서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이 서울 뿐만아니라 지방 미술관에 기부 바람을 일으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다.

이중섭 화백의 '황소'

이건희 유족들의 기증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 제216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보물 제1393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를 소장하게 됨으로써 조선시대 회화실의 빈 공백을 메우게 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평론가들이 100년 뒤 보물로 지정될 작품으로 지목한 박수근의 대작 '절구질하는 여인'을 소장하게 됐다. 더욱이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을 비롯해 피카소, 샤갈, 르누아르, 고갱, 달리 등 서양근대미술의 원화를 소장하는 체면을 세우게 됐다.

또한 대구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 제주도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등도 지역을 대표하는 화가의 명작을 대거 확보하게 됐다. 특히 홍라희 여사(전 리움 관장)는 박수근미술관 건립에 고문으로 참여한 데 이어 자작나무 숲을 조성해주고 이번에 미술품 18점을 기증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구미술관에는 대구의 화가 이인성의 명작 '석고상이 있는 풍경'이 돌아갔고, 광주시립미술관에는 김환기의 작품 3점과 오지호, 임직순의 작품이 기증됐다. 이중섭미술관에는 이중섭의 제주도 시절을 증언하는 '섶섬이 있는 풍경'이 기증됐고, 지난 달 개관한 전남도립미술관은 천경자의 '만선' 등 21점을 소장하게 됐다.

유홍준 “이번 기부에 조건이 있었다면 지방 미술관에 작품을 미리 배정해 준 것"

홍라희 여사가 기증한 박수근미술관의 자작나무 숲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한 칼럼에서 “유족과 삼성 측에서는 상속세법을 떠나 이건희 회장의 미술문화에 대한 사랑과 사회봉사 정신을 살려 국가에 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라며 “이번 기부에 조건이 있었다면 지방 미술관에 작품을 미리 배정해 준 것이다. 이는 삼성이 우리나라 지방 미술관의 실태가 얼마나 열악한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준 선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남주 화가는 “그간 지방에서는 전시 등이 열악한 반면 수도권에만 문화예술적 혜택이 몰리는 상황이 안타까운 마음이었다”며 “이번에 ‘이건희 컬렉션’이 지방에도 기증돼 관광객 유치는 물론 지역경제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어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기증이 선의(善意)에서 나오지만 기증자에 대한 예우는 너무나 소박하다는 점이다. 기증품을 모아 특별 전시를 개최하거나, 기증자나 유족의 이름을 미술관 벽면에 새기거나, 감사패를 전달하는 정도다. ‘문화 기부’ 활성화를 위한 인센티브 개발이나 제도적 장치가 강화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다.

특히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대납할 수 있도록 하는 ‘미술품 물납제’ 논의가 국회와 미술계를 중심으로 재점화하고 있다. 일각에서 우려하는 소장품 감정 문제는 권위있는 감정평가에 의해 자산가치를 매길 수 있다고 문화계는 자신한다. 상속세 범위 내에서 물납제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백기영 서울시립미술관 운영부장은 “국가의 공공재인 문화재나 미술품을 증여세 대신에 물납제를 현실화해야 한다”며 “물납제에 따라 소장품을 소유한 재력가들이 사회환원을 한다면 상징적 의미 뿐만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기증문화로 국공립 미술관 등에 다량의 기증이 늘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납제 논의의 시초는 간송 전형필 선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형필 선생이 1962년 불과 57세 나이에 갑자기 별세하자 상속세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됐다. 유족들이 상속세를 내자면 간송 소장품의 절반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이 당국에 호소해 미술문화재단을 세워 이관한다는 조건으로 상속 대상에서 면제받았다. 2013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됐고 미술품이 이관됐다.

이어 지난해에 간송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던 보물 불상 2점을 상속세 부담으로 경매에 내놓으면서 상속세를 문화재나 미술품으로 내는 물납제도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제기됐다.

이병철 삼성 창업자, 이건희 삼성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건희 회장은 삼성미술관 ‘리움’을 세계적 미술관으로 만들기 위해 정성을 쏟아왔다. 미술관을 통한 문화강국을 꿈꿨던 것.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 LA의 폴 게티 뮤지엄, 빌바오의 구겐하임 뮤지엄 등을 구상했을 수 있다. 명화 한 점에 1000억원이 넘는 서양 근현대미술품을 사재를 털어 구입한 이유일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 중 주요 작품들은 리움 개관식을 비롯 특별전에 이미 전시된 바 있다. 주요 국보와 보물들은 미술사 도록에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으로 표기돼 있다. 이건희 회장이 생존했다면 리움으로 이관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희 컬렉션’은 리움으로 못가고 상속세 대상이 됐다.

간송 사례처럼 '이건희 컬렉션'도 삼성문화재단으로 이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민정서법'상 간송은 되지만 삼성은 그럴 수 없었다.

프랑스, 미술품 물납제 처음 도입...영국 기증자 이름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 혜택

김소현 법무법인 예주 대표변호사는 칼럼을 통해 “적어도 우리나라 국보급, 보물급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납부하는 물납제의 도입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며 “문화재를 보유한 개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세제 혜택을 주고, 상속할 경우 개인 금고 안에 들어 있던 우리 문화재로 상속세를 납부할 수 있게 하여 세상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문화재·미술품 물납제는 개인의 희생과 노력이 아닌 제도를 통해 우수한 문화유산을 확보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술품 물납제도는 프랑스가 1968년 세계 처음 도입했다. 국가유산을 박물관이 잘 보존할 수 있게 조세 금전납부 원칙의 예외를 뒀다. 영국은 물납을 승인받은 납세의무자는 부담 상속세에서 25%의 세금 감면 혜택을 받도록 했다. 일본은 동산에도 물납을 허용하고, 상속세에 한해 미술품 물납을 허용하고 있다.

영국 국립미술관 '테이트 모던'은 기증자 이름을 명칭으로 사용했다

기증자 이름을 국립미술관 이름으로 사용해 혜택을 주기도 한다. 영국의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2019년 600만 명 넘게 방문했다. 영국 국립현대미술관 이름이 테이트인 이유는 사업가 헨리 테이트가 국가에 기증한 근현대미술품 65점과 건립 비용을 토대로 1897년 세워졌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고흐 작품을 270점 이상 소장한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도 소장품과 미술관 부지를 기증한 설립자 이름을 딴 국립미술관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도 예술품 수집가였던 티센 보르네미사 남작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설립된 국립미술관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건희 컬렉션’을 전시할 공간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부산 대구 수원 등 지방자체단체들의 유치경쟁이 뜨겁다. 과연 한국판 ‘테이트 모던’ 국립 이건희미술관이 세워질까?

김명곤 전 문화부장관은 "문화 기부는 문화 창작 기반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면 좋겠다"며 "개인 소유 보다 공공에 기부하면 훨씬 많은 대중들이 볼 수 있고 지역 발전 등에도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연간 방문객 수는 1000만 명이 넘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서다. 국립 이건희미술관이 세워진다면 세계인들이 한국을 찾을지도 모른다. ‘재벌 삼성’이라는 색안경 보다는 안목 높은 예술품수집가로서 문화 기부의 선례를 남긴 ‘이건희 컬렉션’을 바라보자는 문화계의 평가가 주목받는 이유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

▶ 기사제보 : pol@greened.kr(기사화될 경우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 녹색경제신문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