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경 칼럼] 사모펀드 사태와 금융당국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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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경 칼럼] 사모펀드 사태와 금융당국의 민낯
  • 이승제 기자
  • 승인 2021.04.14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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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충수를 둔 금융당국, 지위우월적인 처벌에 연연
-억울한 금융사들, 행정소송에 내몰려
-금융당국, '사령탑' 아닌 '필드'로 내려와야

#‘사후약방문’은 금융당국의 숙명이다. 첨단 금융기법으로 다양한 구조가 얽히고설킨 투자 상품이 잇달아 등장하고 있어 문제 소지를 원천봉쇄하기 어렵다. 상품 구조의 해석조차 빠듯한데, 시장에 미칠 영향을 미리 가늠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중순 국회에서 라임·옵티머스펀드 사태와 관련해 “사모펀드 시장이 갑자기 팽창했는데 금융감독 측면에서 이를 다 따라가지 못한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금융당국은 119처럼 움직여야 한다. 사고가 터지면 신속하게 출동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시스템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그런데 수습과 대책 마련보다 사고의 원인과 책임자를 가려 처벌하는데 골몰한다면? 문제가 터질 때마다 금융소비자의 피해만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국내 금융시장을 강타했던 해외금리연계 DLF(파생결합펀드), 라임·옵티머스 펀드 사태의 ‘궁극적인’ 책임은 금융당국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궁극적’이라 한 이유는 사태 발생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국내 사모펀드 시장의 활성화를 꾸준히 추진해왔다. 지난 2015년 사모펀드의 일반 투자자에게 요구되는 최소 투자금액을 5억 원에서 1억 원으로 대폭 낮췄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올해 2월 이를 3억 원으로 올렸다. 금융정책 실패의 대표 사례로 남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충수’를 둔 셈인데, 당국으로선 꽤나 민망했을 것이다.

금융사들의 불완전판매, 금융당국의 감독 실패를 논하기 전에 정책적 오류부터 따져봐야 한다. 자본시장 선진국인 미국은 사모펀드 투자자격을 매우 깐깐하게 제한한다. 자산 규모와 상관없이 사모펀드 관련 변호사나 회계사 등 금융 분야 자격증을 갖고 있는 경우에만 사모펀드의 일반 투자자 자격을 허용해 준다.

#자존심이 구겨졌기 때문일까. 금융당국은 사태 발생 이후 처리 과정에서 신경질적인 반응과 대응을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당국이 금융지주와 은행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 태도가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옥동 신한은행장은 최근 제재심의위원회에 출석하기 위해 금융감독원을 세 번 찾았지만 두 차례나 헛걸음했다. 신한은행에 대한 심의 직전에 열린 우리은행 제재심이 길어졌다. 그런데도 금감원은 양해를 구하기는커녕 진 행장을 무작정 대기시켰다. 당하는 입장에서 명백히 ‘갑질’이다.

몇몇 금융사들은 금융당국의 강경한 대응과 처벌에 맞서 소송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예전 같으면 서슬 퍼런 금융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벌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법적으로 명확하게 죄를 특정하고 그에 맞는 처벌을 내리는 대신 모호하고 지위우월적인 처벌을 강요한다면 누구든 누명을 벗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다.

#때마침 문제되는 금융지주와 은행 수장들의 임기 만료가 다가왔고 금융당국은 사모펀드 사태를 좋은 기회로 여겼을 것이다.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중징계를 내리면 당연시되던 재연임은 물 건너가고 금융당국의 위력을 멀리, 깊게 각인시킬 테니 말이다.

금융당국의 이런 행보 뒤에는 오래된 ‘관점’ 혹은 ‘관행’이 놓여있다. ‘금융당국은 금융사들을 지휘·통제하는 사령탑’이란 말은 시장에서 낡고 무용한 것으로 판명됐는데, 금융당국은 여전히 강한 향수를 느끼고 있는 듯하다.

사태 해결의 수순과 방식을 봐도 그렇다. 처벌은 처벌대로 진행하되 효과적인 재발방지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최우선 과제가 돼야 했다. 하지만 관련 금융사 CEO(최고경영자)에 대한 제재 이슈가 모든 걸 덮어버렸다. 어느 틈엔가 예방 시스템 마련과 펀드 사태로 얻어야 할 교훈 등은 뒷전으로 밀렸다.

‘관점’을 바꿀 때라고 시장 전문가들은 말한다. 금융당국이 서야 할 자리는 ‘사령탑’이 아니라 ‘필드(field)’다. 심판은 공정하고 원활한 경기 진행을 위해 존재한다. 심판의 권위는 공정한 기준과 정확한 판단에서 나온다. 감독과 선수를 제멋대로 퇴장시킨다고 심판의 권위가 세워지는 건 아니다. 최고의 심판은 TV 화면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 경기를 부드럽게 이끌고 간다. 억지로 무엇을 이루려 애쓰지 않는 경지, 무위(無爲)다.

이승제 기자  openeye9@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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