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경제신문 = 임채영 기자]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돈 없다면서 정작 제 돈은 안 갚고 BMW 몰고 다녀요. 아내랑 자식들 앞으로 재산 다 빼돌린 거 뻔히 아는데, 법적으로 따져보면 저한테 갚을 돈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이제는 법으로 더 철저히 보호된다니 기가 찰 노릇이죠."
서울의 대한법률구조공단 상담실 앞. 무료 법률 상담을 기다리던 50대 여성 A씨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자조 섞인 경고를 내뱉었다. 수년째 지인에게 빌려준 5천만 원을 받지 못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곳을 찾았다는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 '빚투'는 가십이 아니었다... 법이 외면한 채권자들의 '마지막 신문고'
A씨의 분노는 단순한 개인의 하소연이 아니다. 한동안 사회를 휩쓸었던 '빚투(빚+Me Too)' 논란을 기억하는가. 대중은 이를 연예계 가십으로 소비했지만, 실상은 법이 외면한 개인 채권자들이 마지막으로 두드린 처절한 신문고였다. 법적으로 돈을 받을 길이 막히자, 사회적 망신 주기라는 극약 처방을 쓴 셈이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 법학 개론 첫 수업에서 배우는 이 격언은 자본주의 신용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기초적인 합의다. 하지만 2026년 대한민국에서 이 약속은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와 법의 과도한 배려 앞에서 무참히 깨지고 있다.
◇ 월 250만 원의 딜레마... "생존권 보장이냐, 도덕적 해이냐"
물론 오는 2월 1일부터 시행되는 「민사집행법 시행령」 개정안의 취지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고물가 시대에 기존 185만 원으로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채무자를 막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숨구멍'은 넓혀주는 게 맞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선의의 정책이 현장에서는 악성 채무자들의 합법적 도피처로 변질될 위험이 크다는 점이다.
새로 도입되는 '생계비계좌'는 월 250만 원까지 압류를 원천 봉쇄한다. 채무자가 정말 생계가 곤란한 상황이라면 다행이지만, A씨의 사례처럼 가족 명의로 재산을 빼돌리고 겉으로는 '빈털터리' 행세를 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월 250만 원이면 1인 가구 기준으로 기본적인 생활은 물론, 어느 정도의 여가 생활도 가능하다. 악성 채무자가 이 틈을 파고들어 "법대로 배 째라"고 나올 때, 채권자가 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이 사실상 전무해진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현재의 법 제도는 무게중심이 급격히 채무자 보호로 쏠려 있다. 채권자는 판결을 받아도 10년마다 시효 연장 소송을 해야 하고, 채무자의 은닉 재산을 직접 찾아내 입증해야 한다.
정부가 채무자의 '최저 생계'를 걱정하는 동안, 떼인 돈을 받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영세 채권자의 생계는 정책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다. "돈 빌려준 게 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채권자의 재산권 행사는 꽁꽁 묶여버린 셈이다.
◇ "원가 23%인데 금리는 20%"... 정부가 만든 '마이너스 구조'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형 채권자(대부업체)들 역시 정부의 '일방통행식'정책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본지가 한 업권 관계자를 통해 취재한 결과, 현재 업계가 처한 상황은 '구조적 적자' 상태인 것으로 드러났다.
업권 관계자는 "한국금융연구원 분석(이수진 연구위원)에 따르면 대출 원가 금리의 손익분기점은 최소 23% 수준"이라며 "법정 최고금리가 20%로 묶여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대출을 내줄수록 마이너스 이익률을 기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토로했다.
최근 논란이 된 '새도약기금(부실채권 매입)' 관련 잡음에 대해서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일각에서는 대부업체들이 정부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고강도 추심으로 보복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이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관계자 측은 "이미 법적으로 추심 절차와 방법이 엄격히 정해져 있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사무실을 찾아가거나 위협하는 식의 '강력 추심'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채권자가 상환을 독촉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 행사일 뿐, 보복성으로 강도를 높인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일축했다.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구체적인 인센티브나 가이드라인도 확정하지 않은 채, 원가에도 못 미치는 낮은 매입률을 제시하며 "무조건 따르라"고 압박하는 것은 사기업에게 과도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협회는 "향후 2~3년간 업계의 위축과 폐업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 결국 피해는 '진짜 돈이 급한' 서민에게 돌아간다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따로 있다. 채권자(개인이든 기업이든)의 권리가 무시될수록, 돈을 빌려주는 문턱은 턱없이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법정 최고금리 규제로 합법 대부업체들이 문을 닫고, "울고불고 사정해도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절대 빌려주지 말라"는 A씨의 경고처럼 개인 간 거래마저 실종되면 그 피해는 누구에게 갈까.
고스란히 '성실한 서민'들이다. 사업 실패나 병원비 등 잠깐의 시련으로 급전이 필요한, 그러나 성실히 갚을 의지가 있는 정직한 이웃들이 제도권 밖 불법 사채 시장으로 내몰리게 된다.
최저생계비 인상은 필요했다. 하지만 악용을 막을 '거름망' 없이 보호막만 높인 결과가 신뢰의 붕괴로 이어진다면, 그 대가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임채영 기자 lycaon@greened.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