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층 페달 오인 사고로 피해자에 인색해진 여론
전문가들, "급발진은 있다"... 제조물책임법 개정은 신중해야
[녹색경제신문 = 김지윤 기자] 차량 급발진 사고에 대해 제조사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판례가 올해 연달아 나오며, 국내에서는 급발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불과 1, 2년 전까지 차량 급발진에 대해 피해자를 동정하던 여론의 흐름이 반전된 것이다.
지난 달 29일 대법원은 2018년 호남고속도로에서 발생한 BMW 급발진 사고에 대해 제조사의 책임을 인정하는 항소심의 판결을 뒤집고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2018년 BMW 급발진 사고는 66세 운전자가 시속 약 200km로 주행하며 가드레일을 들이받아 운전자와 조수석에 있던 남편이 모두 사망한 사례다. 유족은 이 사고가 차량의 급발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BMW코리아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 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유족은 이에 항소했고 2심에서 법원은 사고 직전 평소와 다름없는 운전 상황과 운전자의 건강 상태, 과속 이력 부재 등을 고려해 BMW코리아가 유족에게 1인당 4000만 원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내 급발진 사고에서 제조사의 책임을 인정한 첫 사례였다. 최근 대법원은 이를 뒤집고 제조사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올해 5월에는 지난 2022년 강릉에서 발생한 티볼리 급발진 사건, 일명' 도현이 사건'에 대해 춘천지방법원은 1심에서 원고(유족측)에 패소 판결을 했다. 법원은 EDR 기록에서 사고 전 5초 간 가속페달이 '풀악셀' 상태로 기록된 점을 인정해 운전자의 패달 오인을 사고 원인으로 규정했다.
이에 네티즌들은 "애초에 급발진 같은 건 없다", "왜 급발진은 꼭 노년층 운전자에게서 발생할까", "설령 급발진이 난다 해도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일은 없다"며, 모든 급발진 사고를 운전자의 페달 오인으로 규정짓는 여론이 생기고 있다.
▲ 전문가 "급발진 발생 가능성 있어"... 국내 기업-소비자 '기울어진 운동장' 여전
하지만 업계에서는 급발진 가능성이 0%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급발진은 전자제어 계통의 이상으로 발생하는데, 사고 후에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에 급발진 원인을 규명하기가 어려울 뿐이라는 게 전문가 의견이다.
브레이크 제동력이 엔진 출력보다 우위에 있어서 제동 페달을 밟을 시 급발진을 막을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반론이 존재한다.
고RPM 상태에서 엔진 출력이 극대화되면 브레이크 과열, 부스터 고장 등의 이유로 제동 페달이 밟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온 힘을 다해 제동페달을 밟아야 가속을 막을 확률이 올라가지만, 당황한 운전자들은 이를 인지하기가 어렵다.
현재 국내에서는 제조사와 소비자 모두 주장을 증명하지 못하는 경우, 소비자에 불리하도록 법이 제정돼 있다. 국내 제조물책임법 상 제품의 결함을 소비자가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단체와 연구단체는 이 부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 겸 자동차급발진연구회 회장인 김필수 교수는 "3만 개가 넘는 자동차 부품을 소비자가 일일이 조사해 하자를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제조사들은 최대한 재판을 오래 끌어 피해자가 비용 부담으로인해 소송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해외에서도 아직 급발진 사고 원인이 100% 규명된 사례는 없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제조사가 소비자 과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재판부는 피해자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조정하는데, 국내 법과 가장 다른 부분이다"라며 "국내 제조물책임법은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소비자에게 매우 불리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계류 중인 '도현이법'... "제조사가 규명 책임지는 경우의 수 만들어야"
이에 국회에서는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었다. 강릉 티볼리 급발진 사건의 피해자 이도현군의 이름을 딴 일명 '도현이법'이다.
개정안의 핵심은 피해자 '결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제조사가 '결함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해당 법안은 21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산업계의 반발로 계류 후 폐기됐다가 22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됐다. 이번에 발의된 개정안도 국회 정무위에 계속 계류 중이며, 구체적인 심사나 본회의 상정 등의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결함 증명의 책임을 극단적으로 제조사에게만 묻는 방안도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부 악의적인 소비자들이 기업의 영업활동을 고의로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업계가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에 대해 난색을 표하는 이유다.
김필수 교수는 "사실 너도나도 급발진이라고 주장하는 사고 중 99%는 급발진이 아니다. 급발진은 그렇게 쉽게 나지 않는다. 제조사가 모든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게 되면 블랙컨슈머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결함 증명의 주체를 결정하는 기준을 산정하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소비자나 제조사 한쪽에만 규명에 대한 책임을 몰아주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맞추자는 취지다.
김 교수는 "1분 이상 차량이 가속하는 경우, 그 시간 내내 운전자가 같은 압력으로 가속페달을 밟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과속방지턱을 시속 100km 이상으로 넘게 되면 차량이 붕 뜨는데, 그럴 때 운전자의 몸도 함께 뜨면서 자연스럽게 가속페달에서 발이 떼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위의 예시처럼 블랙박스와 EDR 기록이 상이한 경우, 충분히 차량 이상을 고려해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원인 규명의 주체를 정할 때 제조사와 소비자가 공감할 수 있는 기준을 두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야 제조사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최근 고령의 운전자가 실제로 페달을 오인해 인명피해까지 초래하는 사고가 연달아 발생하면서, 급발진에 대해 운전자의 귀책을 우선시 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이 실재로 존재하는 만큼, 모든 사고에서 운전자에게 귀책사유를 돌리는 것은 것은 2차가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지윤 기자 lycaon@greened.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