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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야기] 생명의 시작 RNA...35억년전부터 RNA 빅 히스토리

35억년 전부터 35년 후까지... RNA 빅히스토리

"태초에 알앤에이(RNA)가 있었다. 그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물질을 무한히 복제할 수 있었고, 새로운 물질을 필요한 만큼 만들어내는 능력도 갖고 있었다. 생명생산(生命生産)과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대업을 맡기에 손색이 없었다.

스스로를 계속 복제해 자신이 갖고 있던 정보를 후대에 전달(유전)하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화학반응까지 설계하던 RNA는 문득, 이 모든 일을 혼자 해내기보다 좀더 효율적인 방법을 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여러 물질 중 2인자를 물색하던 RNA는 묘수를 찾아냈다. 유전은 자신 못지않게 복제를 잘 하는 DNA에게 위임하고, 다양한 화학반응을 종류별로 맡아 수행할 수 있는 단백질을 생산하는 공장(리보솜)을 지은 것이다. DNA와 단백질, 리보솜 덕분에 RNA는 이 모든 생명현상을 '조절'하는데 집중할 수 있게 됐고, 지구에는 생명체가 속속 자리잡기 시작했다."

약 35억년 전 지구에 최초의 생명체가 등장하기까지 미시세계에서 일어났을 법한 일을 추측한 가상 시나리오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현존하는 생명체는 결국 RNA가 주도한 업무의 분업화, 전문화로 빚어진 산물이다.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는 의견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RNA 연구자들의 추론을 바탕으로 상상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DNA나 단백질 연구자들에게 '동의'를 얻은 시나리오도 물론 아니다. RNA와 DNA, 단백질은 모두 생명현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물질이다. RNA는 그 중 연구 역사가 가장 짧다. 그럼에도 RNA 연구자들이 RNA가 생명의 원천일 가능성이 높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유는 현재 DNA와 단백질이 주로 맡고 있는 기능이 RNA에 여전히 일부 남아 있기 때문이다.

DNA 없이도 유전정보 전달

현생 세포에서는 이전 세대의 정보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유전물질이 대부분 DNA다. DNA는 잘 알려져 있듯 당과 인산으로 구성된 이중나선 골격 안쪽에 4가지 종류(A, T, G, C)의 염기가 서로 쌍을 이루며 배열돼 있는 구조다.

한 분자였던 DNA는 두 분자가 된 다음 세포(모세포)가 둘로 분열할 때 갈라진 각 세포(딸세포)로 하나씩 나뉜다. 그리고 딸세포에서 자신의 복제본을 바탕으로 모세포와 동일한 RNA를 만들어낸다. 사람 몸에 있는 DNA의 염기쌍은 약 30억개다. 여기에 담긴 유전정보가 다음 세대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RNA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바이러스에서는 RNA 자체가 DNA처럼 유전물질로서 역할을 한다. 독감(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대표적인 예다. 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의 세포 안에서는 바이러스의 RNA가 자신을 계속해서 복제해낸다. 이중나선인 DNA와 달리 RNA는 한 가닥의 나선 구조다. 인체 세포 내로 들어간 RNA는 일단 주형 틀이 될 반대쪽 나선을 만든 다음, 그로부터 자신을 복제해 증폭시킨다.

마치 DNA의 이중나선이 풀리면서 각각을 주형 틀로 이용해 RNA가 만들어지는 전사(Transcription) 과정과 유사하다. 이를 통해 독감 바이러스는 DNA 없이도 자신의 유전물질을 후대에 무사히 전하며 잘 살아간다.

후천성 면역결핍증(에이즈) 바이러스(HIV)의 RNA는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전사 과정을 뒤엎는다(역전사). RNA를 바탕으로 DNA를 만들고, 여기서 다시 RNA를 만드는 식이다. 이 정도면 DNA에서 RNA, RNA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진다는 생물학의 중심이론인 '센트럴 도그마(Central dogma)'가 무색해진다. RNA 연구자들은 이렇게 RNA가 스스로 유전물질로 작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데다, 여러 생물체에서 이 능력을 선택적으로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DNA의 '형님 뻘'인 물질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단백질 공장에서 효소 능력 발휘

DNA의 능력이 복제와 RNA 합성의 두 가지에 머무는데 비해 RNA는 훨씬 다재다능하다. DNA 상에서 하나의 RNA를 만드는 단위를 유전자라고 부르는데, 사람에게는 유전자가 약 10만개 있다. 그 중 RNA를 통해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유전자는 3만~3만5,000개 정도 된다. 이렇게 DNA의 유전정보를 단백질로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RNA에 과학자들은 메신저RNA(mRNA)라는 이름을 붙였다.

메신저RNA는 리보솜이라는 세포 내 구조물에 붙어서 전달RNA(tRNA)의 도움을 받아 단백질을 생산한다. 메신저RNA 상에는 그때그때 정확히 어떤 단백질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암호화해 담겨 있다. 염기 3개의 종류와 배열(코돈)이 하나의 아미노산(단백질을 구성하는 단위 물질)을 의미하는 식이다(코딩). 암호에 따라 아미노산이 서로 연결되면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코돈은 단백질을 지정하는 일종의 '모스 부호'인 셈이다.

그렇다면 메신저RNA 말고 나머지 RNA는 단백질 안 만들고 뭘 하는 걸까. 과거엔 단백질 정보를 직접 담고 있지 않은 유전자나 RNA(Non-코딩RNA)가 쓰레기 취급을 받기도 했다. 단백질 생산까지 오는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만들어졌을 뿐 별다른 기능이 없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 예쁜꼬마선충의 성장을 조절하는 중요한 유전자가 단백질을 암호화하지 않는 짧은 RNA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과학자들이 이를 마이크로RNA(MicroRNA)로 이름 붙이면서, RNA의 역할이 결코 단백질 생산에 필요한 중간자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메신저 RNA가 평균 1,000개 이상의 염기로 이뤄져 있는데 비해 마이크로RNA의 염기는 20여개밖에 안 된다. 아주 작지만 생체 내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특정 단백질이 지나치게 만들어지는 걸 억제하거나, 침입자인 바이러스의 RNA에 달라붙어 복제를 방해하거나, 문제가 생긴 DNA에 결합해 이상 단백질이 생기지 않도록 RNA 합성을 저해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유전자와 단백질 발현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불필요한 것들이 생기지 못하도록 하는 세포 속 경찰관이 바로 마이크로RNA다. 김빛내리 기초과학연구원(IBS) RNA연구단장은 마이크로RNA 연구의 세계적인 리더로 꼽힌다. 마이크로RNA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에 어떤 단백질들이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밝혀내는 데 김 단장의 연구가 크게 기여했다.

리보솜RNA도 빼놓을 수 없는 Non-코딩RNA다. 리보솜RNA는 몇몇 단백질과 함께 세포 내 단백질 생산공장인 리보솜을 구성한다. 이 공장에서 단백질은 보조적인 기능만 할 뿐 '실세'는 리보솜RNA다. 리보솜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단백질 합성 과정의 핵심인 아미노산 연결 반응이 원활하게 일어나도록 돕는 촉매 작용을 한다.

생체 내에서 화학반응의 촉매 작용은 효소라고 불리는 단백질이 담당하는 게 보통이다. 리보솜RNA가 스스로 효소로서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연구는 '효소=단백질'이라는 공식을 깨며 노벨상을 받았다. RNA 연구자들은 RNA가 효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백질에게도 '형님 뻘'인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생명의 기원이 DNA나 단백질이 아니라 RNA일 거라는 가설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RNA를 구성하는 염기(A, U, G, C)도 DNA처럼 4가지인데, 그 중 한 가지만 둘이 서로 다르다. DNA의 티민(T) 대신 RNA에는 우라실(U)이 있다. 생체 내에서 생성되는 순서를 따져보면 U가 먼저 만들어지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T가 만들어진다. 태초에도 U가 먼저 존재했을 거라는 추측이 설득력이 있다.

증상 없이도 진단하는 세상

RNA 연구자들이 RNA에 열광하는 까닭은 사실 RNA가 생명의 기원일 가능성이 높아서만은 아니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미래 의료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후보이기 때문이다. 생명현상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유전과 효소 기능의 대부분이 각각 DNA와 단백질로 넘어간 현생 세포에서 RNA의 핵심 임무는 조절 작용이다.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고 나이 들고 죽는 생로병사 과정 전체에 RNA의 조절 능력이 프로그래밍돼 있다. 이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병이 생긴다. 병원 신세를 지기 전에 RNA의 조절 능력을 정상으로 되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삶의 질은 껑충 뛸 것이다.

인류 최대 난제인 암을 통제할 수 있다는 희망도 RNA 덕분에 생겼다. 특정 환자의 암세포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내는 물질(항원)을 찾아 이를 합성하는 RNA를 디자인한 다음, 이를 환자의 면역세포에 발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RNA가 항원을 만들기 시작하며 환자의 몸에선 빠른 속도로 항체가 생성돼 면역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원리로 암 치료약은 물론 예방 백신도 가능하다.

진단 기술 역시 RNA가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의 진단은 대부분 환자의 증상이나 조직 변화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진단이 정확하게 나왔어도 이미 병이 한참 진행된 경우가 많다. 사람이 느끼기엔 별다른 증상이 없더라도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면 세포마다 특이한 RNA가 만들어진다. RNA를 정기적으로 검사할 수 있다면 세포 상태를 보고 곧 어떤 병이 나타날 위험이 있다는 판단이 가능해진다.

암 백신도 RNA 조기 진단도 아직은 상상 속의 장면이다. 하지만 동네 의원 가서 "RNA 검사하러 왔어요"라고 이야기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RNA 연구자들은 확신하고 있다. 아령처럼 크고 무거웠던 휴대전화가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데 불과 20여년이 걸리지 않았나. 35억년 전 태초의 RNA가 35년여 뒤 어떤 모습으로 인류의 일상을 바꿔놓을지 흥미진진하다.

<자료협조=IBS>

한익재 기자  gogreen@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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