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야기] 13만 km 혈관에 숨어 있는 삶과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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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야기] 13만 km 혈관에 숨어 있는 삶과 건강
  • 한익재 기자
  • 승인 2017.05.2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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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서 다리가 붓고 저리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승객들이 종종 있다. ‘이코노미클래스 증후군’이라 불리는데, 심부정맥혈전증(DVT, Deep Vein Thrombosis)이 원인이다. 좁은 자리에서 오랫동안 옴짝달싹 못하면 아무래도 혈액순환이 원활치 않다.

이 때 혈액이 굳어 혈전이 발생하고, 혈전이 정맥을 막으면 이상 징후가 발생한다. 장거리 비행 뿐 아니라 잘못된 자세 탓에 일상생활 중에도 이상 징후를 겪을 수 있다. 대개 작은 통증으로 그치지만, 혈전이 심해지면 호흡곤란, 가슴통증, 정맥성 고혈압 등 심각한 증세가 나타나고 사망까지 이를 수 있어 가볍게 여길 수만은 없다.

암에 이어 심뇌혈관질환은 한국인 사망원인 중 두 번째로 꼽힐 만큼 혈관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꽤 크다. 혈관 흐름이 원활치 않거나 어느 한 곳에 이상이 생기면 몸의 대사는 엉망이 되고 만다. 혈관이상은 동맥경화, 뇌경색, 치매, 폐색전증, 패혈증 등 여러 질병으로 이어지고, 때로는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든다.

우리 몸속 혈관은 13만km에 달한다. 지구 두 바퀴 반을 돌 수 있는 대단히 긴 조직이다. 직경 2~3cm의 대동맥부터, 적혈구도 한 줄로 서야 통과할 수 있는 모세혈관까지 굵기도 다양하다. 심장의 펌프질을 받아 혈액을 몸 곳곳의 조직과 세포로 실어 나르고, 다시 심장으로 운반해오는 통로다.

혈액에 포함된 산소, 영양분, 호르몬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배설기관으로 수송한다. 과학자들은 이처럼 중요한 혈관이 어떻게 생성·분화·유지·재생하고, 제대로 작동하는지 이해해고자 노력하고 있다. 건강한 삶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혈관의 비밀을 하나하나 밝혀가면서 생명에 대한 지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은 물론 난치병 치료의 새로운 길도 열리고 있다.

신생혈관 억제로 암세포를 굶겨 죽이는 법

혈관의 원활한 생성은 몸속 각 기관·조직의 건강과 재생에 결정적이다. 역설적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암세포가 증식할 때도 필요하다. 정상 세포보다 훨씬 빠르게 증식하는 암세포는 산소와 영양분을 얻고자 새로운 혈관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만들어진 신생혈관은 암세포의 보급망이자, 다른 기관으로 암을 전이시키는 통로가 된다. 이에 최근에는 암세포 대신 암 혈관을 공격하는 항암제 개발이 활발하다. 암세포에 영양을 공급하는 혈관 생성을 막아 암세포를 ‘굶겨 죽이는’ 셈이다. 또 신생혈관 생성을 막는 식이요법도 주목을 끌고 있다. 적의 보급망을 끊는 전략이 치료효과를 높여가고 있는 셈이다.

IBS 혈관 연구단을 이끄는 고규영 단장(카이스트 교수)은 암세포와 혈관 생성의 관계를 꾸준히 연구했으며, ‘이중혈관신생차단제(DAAP)’를 개발했다.

DAAP는 혈관신생을 촉진하는 두 가지 성장인자(VEGF, Ang2)를 동시에 차단해 암 성장과 전이를 훨씬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 단장은 또 암 조직에서 혈관 생성과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RhoJ 단백질을 발견, 이 단백질의 발현을 막으면 암세포의 혈관 성장과 전이를 억제할 수 있음을 동물실험으로 입증했다.

혈관 파괴하는 치명적 질병 패혈증, 치료 실마리 찾아

매년 전 세계에서 19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는 패혈증은, 주요 장기의 모세혈관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병이다.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병하기 때문에 원인을 명확히 규명해 표적치료제를 개발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4월 21일, IBS 혈관 연구단은 패혈증이 악화되는 과정을 규명, 패혈증 치료의 새로운 실마리를 발견했다.(사이언스 중개의학, 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 발표)

패혈증은 진행과정에서 혈관내피세포의 항상성을 깨뜨려 혈관 손상과 혈액 누출을 유발한다. 내피세포를 감싸주는 주변지지세포가 조직에서 탈락하고 내피세포표면층이 무너지면서 혈액과 염증세포 등이 혈관 밖으로 누출된다. 연구진은 혈관내피세포의 항상성에 관여하는 TIE2 수용체와 ANG2 단백질의 역할에 주목했다. TIE2 수용체를 활성화하면 혈관벽을 튼튼하게 하고, ANG2 단백질의 작용을 억제하면 혈관 손상을 예방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에 연구진은 ANG2 억제와 TIE2 활성화를 동시에 구현하는 항체 ‘앱타(ABTTA)’를 개발했다. 연구진은 실험동물에 앱타를 적용, 폐와 신장에서 혈관손상이 감소하며 생존율이 현저히 증가함을 확인했다. 앱타를 항생제와 함께 투여하면 생존율은 약 70%까지 높아졌다.

‘혈액순환 도우미’ 일산화질소의 재발견

현대과학은 독성 물질로만 여겨지던 일산화질소(NO)가 몸속에서 혈관 이완과 확장, 신호전달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을 밝혔다. ‘혈액순환 도우미’ 이자 ‘메신저’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로버트 퍼치고트, 루이스 이그나로, 페리드 뮤라드 박사 등은 일산화질소의 이러한 기능을 발견한 공로로 199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발기부전제로 유명한 ‘비아그라’는 일산화질소의 혈관확장 기능을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일산화질소의 역할이 밝혀진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일산화질소는 위급 상황 또는 표적치료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몸속에 갑작스럽게 일산화질소가 다량 투입되면 혈압이 급격히 떨어져 쇼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과학자들은 일산화질소를 혈관 등 특정 환부로 운반할 수 있는 전달물질 개발에 애쓰고 있다.

지난 3월 IBS 복잡계 자기조립 연구단(단장 김기문)의 김원종 그룹리더 연구팀과 서울대 의대 김정훈 교수팀은 ‘스마트 일산화질소 전달 시스템’을 개발, 동물 안구의 손상된 각막상피세포 치료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이 개발한 시스템은 다량의 일산화질소를 저장했다가 빛을 활용해 체내에 선택적으로 방출할 수 있는 나노입자 구조다.

많은 연구자들이 쉽게 변질되는 일산화질소의 특성 때문에 전달 시스템 개발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연구진은 나노입자를 활용해 이를 극복하고 빛을 이용해 자유자재로 일산화질소 방출을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현했다. 앞으로 각종 상처는 물론 혈관 질환, 암 등 다양한 질환에 적용할 수 있는 유망한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과학자들은 장기별 혈관의 생성, 분화, 노화, 유지, 재생 등으로 혈관 연구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폐, 장, 갑상선, 눈, 자궁, 지방조직 등은 모세혈관의 생성과 이를 둘러싼 주변의 상호작용이 모두 다르다. 때문에 장기별로 생기는 암이나 염증의 혈관 상태 또한 모두 제각각이다. IBS 과학자들도 장기별·질환별로 서로 다른 혈관의 생성·유지·조절 작용에 대한 핵심 분자물질을 발견하고 그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연구를 통해 그 메커니즘을 파악해 낼 수 있다면, 혈관 질환 치료의 바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료협조 : IBS

한익재 기자  gogreen@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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