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간 결제, 스테이블코인 시대로…국내 기업들 '선점' 경쟁
디지털자산기본법 연내 입법 불투명…금융·플랫폼 기업은 사용처 확보에 속도 쿠팡·우리은행 결제·정산 PoC부터 무역대금·해외송금까지 활용 영역 확대 전문가 "제도화 전 축적된 서비스 모델이 향후 시장 구조에 영향 줄 수 있어"
[녹색경제신문 = 박지안 기자]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를 위한 디지털자산기본법 논의가 지연되는 가운데 국내 금융·플랫폼 기업들이 실제 사용처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동안 시장의 관심이 '누가 발행할 것인가'에 집중됐다면 최근에는 결제·정산·해외송금·무역금융 등 스테이블코인을 실제 금융서비스에 연결하는 기술 검증으로 경쟁의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모습이다. 법안의 세부 내용과 발행 주체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업들이 상용 서비스에 가까운 환경에서 PoC와 실증을 진행하면서 제도화 이후에는 기존에 구축한 사용처와 서비스 모델이 시장 경쟁의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22일 녹색경제신문의 취재에 따르면 국회예산정책처는 최근 스테이블코인이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금융결제 인프라 개선과 통화주권 확보를 위한 제도적 대응 필요성을 제시했다.
결제·정산부터…실제 금융서비스 연결 속도
현재 국내 원화 스테이블코인 실험에서 가장 빠르게 기술 검증이 이뤄지는 분야는 결제와 정산이다. 기존 결제망을 완전히 대체하기보다 플랫폼 결제대금이나 가맹점 정산 등 비교적 명확한 거래 구간에 스테이블코인을 적용하면서 실제 금융서비스와의 연결 가능성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쿠팡과 우리은행은 쿠팡이츠 주문 결제대금을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해 가맹점에 정산하는 PoC를 진행했다. 결제대금을 스테이블코인으로 처리한 뒤 가맹점 정산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물론, 스테이블코인과 법정화폐를 교환하는 온·오프램프까지 상용 환경과 유사하게 검증했다. 스테이블코인을 결제와 정산 과정에 직접 연결해 기존 결제·정산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지를 확인한 것이다. 다만 실제 상용화 여부와 비용 절감 효과는 향후 제도와 사업모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같은 실험은 오프라인 결제와 정산 영역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KG이니시스·카이아·오픈에셋은 지난 5월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부터 오프라인 결제, 가맹점 정산, 해외송금까지 이어지는 PoC를 진행했다. 소비자가 별도의 지갑을 개설하지 않고 QR코드로 결제할 수 있도록 하고, 스마트컨트랙트를 활용해 정산하는 구조다.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히 보유·거래하는 수단이 아니라 실제 소비 과정에 연결하려는 시도다.
국내 결제·정산에서 검증된 활용 범위는 해외 거래로 넓어지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비댁스는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결제 인프라 기업 레인과 협력해 자체 원화 스테이블코인 'KRW1'을 글로벌 결제망과 연결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해외여행과 유학 비용 결제부터 콘텐츠 창작자 정산, 기업 출장비 관리까지 활용처를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국내에서 결제와 정산에 집중된 실험이 해외 결제·송금으로 이어질 경우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활용 범위도 보다 넓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무역대금·해외송금도 활용처로
결제·정산 영역에서 시작된 실험은 무역대금과 해외송금 등 국경 간 거래로도 확대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활용하거나 글로벌 스테이블코인과 블록체인 기반 결제망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해외 거래의 정산 구조를 바꾸려는 실증을 진행하고 있다.
피니버스는 지난해 11월 모기업 질경이와 인도네시아 거래처 간 1000만원 규모 무역대금을 원화 스테이블코인 'KORT'로 정산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이후 규제 샌드박스를 신청했으며, 이달 12일에는 중소 수출기업을 대상으로 실증을 확대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실제 수출입 거래의 대금 정산에 적용하면서 국경 간 거래에서의 활용 가능성을 검증하는 단계다.
해외에서 발행된 스테이블코인을 국내 기업의 수출대금 수취에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비댁스는 B2B 청구·수금 서비스 '청구스'와 협력해 수출기업이 해외 바이어로부터 테더(USDT)·USD코인(USDC) 등 글로벌 스테이블코인으로 대금을 받은 뒤 수탁과 정산까지 이어지는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자체 원화 스테이블코인 'KRW1'과 연계해 온체인 거래와 기존 금융서비스를 연결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활용하지 않고 블록체인 기술을 기존 해외송금·무역금융 인프라에 접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하나금융·두나무 등과 해외송금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는 한편, LG CNS와는 매출채권을 실물연계자산(RWA)으로 디지털화해 이전·정산·거래·관리 과정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는 실증을 진행하고 있다.
'누가 발행하나'에서 '어디에 쓰나'로
이처럼 기업들이 주목하는 지점은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것 자체보다 실제 이용자가 결제하고 기업이나 가맹점이 정산받는 서비스 구조를 확보하는 데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발행 이후 이용처가 충분하지 않으면 실제 거래 수단으로 자리 잡기 어렵지만, 결제·정산망과 연결돼 이용자가 늘어나면 활용 범위도 함께 넓어질 수 있다.
이에 따라 금융회사와 플랫폼·핀테크 기업들은 기존 사업과 접점을 만들 수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활용처 확보에 나서고 있다. 은행은 수탁·결제·해외송금·무역금융, 플랫폼 기업은 가맹점 결제·정산, 핀테크 기업은 글로벌 결제와 기업 간 거래 등 각자의 기존 인프라와 고객 기반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에서 스테이블코인과의 접점을 넓히는 모습이다.
제도화 전 PoC, 향후 시장 경쟁 변수로
현재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논의에서는 발행 주체와 자본 요건, 거래소 관련 규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거론되고 있다. 다만 세부적인 규율 체계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법안의 최종 내용을 기다리기보다 실제 서비스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과 사업모델을 먼저 검증하고 있다. 제도화 이후 기존 PoC와 실증 결과를 바탕으로 관련 규정에 맞춰 서비스를 조정하고 상용화에 나설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업계에서도 선행 실증을 통해 축적한 기술과 운영 경험이 향후 사업모델을 구체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현재 공개된 사례 대부분은 PoC나 실증 단계에 머물러 있어 실제 이용 규모와 경제성, 이용자 확보 여부까지 검증된 것은 아니다. 제도화 이후 어떤 서비스가 실제 상용화로 이어질지는 법안과 하위규정의 구체적인 내용뿐 아니라 각 사업자의 비용 구조와 이용자 확보 여부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 금융권 전문가는 “현재 기업들이 진행하는 PoC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실제 결제와 정산, 해외 거래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단계”라며 “제도화 이후에는 발행 규모보다 실제 이용자가 얼마나 확보되고 기존 금융서비스와 얼마나 자연스럽게 연결되는지가 사업성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아직은 대부분 실증 단계인 만큼 비용 절감 효과나 이용자 확대 여부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며 “향후 법안과 하위규정이 구체화되면 현재 검증된 모델 가운데 어떤 서비스가 실제 상용화로 이어질지 가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