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은행, '예금토큰' 준비 홀로 앞섰다…정작 프로젝트 전체는 9월→4분기로 밀려
스테이블코인에 밀려 한 차례 잠정 중단까지 겪은 사업, 재개 뒤 다시 일정 지연 4대 은행 중 유일하게 거래약관 시행…CU 결제 환경도 준비 중
[녹색경제신문 = 박금재 기자] 한국은행 디지털화폐 실증사업 '프로젝트 한강' 2단계의 예금토큰 실거래 시작 시점이 당초 예상됐던 9월에서 4분기로 미뤄진 가운데, 하나은행이 참여 은행 중 가장 앞선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지난 7월까지만 해도 2단계 예금토큰 실거래를 이르면 9월부터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혀왔다. 하지만 최근 한은 관계자는 "9월 중 실거래는 어려워 보여 4분기 중으로 안내하고 있다"며 "실거래 테스트를 위한 보안점검을 계속 진행하는 동시에 국고금 사업과 관련한 협업 요청과 제도적 검토도 병행하고 있어 구체적인 개시 시점을 특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프로젝트 한강은 한은이 블록체인 기반 기관용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하고, 시중은행이 이를 토대로 예금토큰을 발행해 국민이 실제 지급·결제에 사용하는 과정을 검증하는 사업이다.
이번 지연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이 사업이 이미 한 차례 스테이블코인에 밀려 잠정 중단됐던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대선 전후로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논의가 정치권에서 급물살을 타면서, 한은과 함께 테스트를 진행하던 은행권의 참여 의지가 꺾였고 결국 한은은 2단계 논의를 잠정 중단한 바 있다. 당시 1단계 실거래 테스트 자체도 부진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예금토큰 사용처가 일부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 플랫폼에 한정됐고 그마저도 거래 대부분이 특정 서비스에 쏠렸으며, 개인 간 송금은 허용되지 않는 등 활용 방식이 제한적이었다. 이후 올해 4월경 국제결제은행(BIS)에서 예금토큰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온 신현송 당시 한은 총재 후보자의 취임을 전후해 프로젝트가 다시 힘을 받아 2단계 재개로 이어졌는데, 이번에 또다시 일정이 밀리게 된 것이다.
이런 부침의 배경에는 예금토큰과 스테이블코인 사이의 미묘한 경쟁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아직 법제화되지 않은 스테이블코인 대신, 은행권이 먼저 '예금토큰' 방식으로 새 결제 시장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이라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한 디지털자산업계 관계자는 "예금토큰과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경쟁 관계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목적과 역할을 가진 만큼 함께 발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스테이블코인 입법 논의의 속도에 따라 프로젝트 한강에 대한 시장의 관심과 은행권의 추진 동력이 반비례해 움직여온 셈이다.
이런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은행은 독자적으로 준비 속도를 내고 있다. 하나은행은 지난 8월 28일부터 '프로젝트 한강을 위한 예금토큰거래기본약관'을 시행했다. 이 약관은 이용자가 예금을 예금토큰으로 전환하거나, 예금토큰으로 물품·서비스를 결제하고 다른 이용자에게 이전하는 과정 등에 적용된다. 현재 공개된 자료를 기준으로 4대 은행 가운데 2단계용 별도 예금토큰 거래기본약관 시행이 확인되는 곳은 하나은행이 유일하다. 여기에 하나은행은 전국 CU 편의점 점포를 활용한 결제 환경 구축도 함께 준비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2단계 실거래 테스트는 1단계와 비교해 규모와 기능 모두 확대된다. 참여 은행은 기존 7곳(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IBK기업·부산은행)에 경남은행과 iM뱅크가 새로 합류해 총 9곳으로 늘었고, 예금토큰 지갑 수도 최대 10만개에서 50만개로 확대된다. 사용처 역시 기존 가맹점 중심에서 소상공인과 대형 사업체까지 넓어지고, 생체인증과 개인 간 송금(P2P), 예금토큰 자동 입출금 기능도 새롭게 도입될 예정이다. 지난해 1단계 실거래 테스트에는 전자지갑 기준 8만1000명이 참여해 총 11만4880건의 거래가 이뤄졌는데, 참가자 1인당 거래 횟수가 1.4회에 그칠 만큼 활용도가 낮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2단계에서는 실제 상용화 가능성을 확인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특히 눈에 띄는 시도는 예금토큰을 활용한 국고보조금 지급 실증이다. 가장 먼저 실증을 앞둔 사업은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전기차 충전시설 보조금 지급 사업으로, 기존에 일반 계좌로 지급하던 방식을 예금토큰으로 일부 대체하는 내용이다. 지난 6월 말 응모 사업자 서류 검증까지 마친 상태다.
일정이 늦춰졌다고 해서 은행권의 경쟁 구도 자체가 느슨해진 건 아니다. 오히려 은행들 입장에서는 예금토큰이 단순한 새 결제 수단을 넘어, 계좌·카드·간편결제 앱을 중심으로 짜여 있던 고객의 '주거래 금융 플랫폼' 지위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격전지로 여겨지고 있다. 하나은행이 다른 은행보다 앞서 거래약관을 시행하고 오프라인 결제처 확보에 나선 것도, 프로젝트 자체의 존폐가 스테이블코인 입법 상황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불확실성 속에서, 실제 상용화 준비만큼은 먼저 마쳐두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 사업이 이미 한 차례 정치적 변수로 중단됐던 전례가 있는 만큼, 4분기로 미뤄진 이번 개시 시점 역시 스테이블코인 관련 입법 논의의 속도에 따라 다시 유동적으로 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금융권 관계자는 “예금토큰은 단순히 프로젝트 한강의 실증사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후 은행의 결제·송금 인프라와 연결될 수 있는 만큼, 은행 입장에서는 실제 서비스가 가능해졌을 때를 대비해 관련 시스템과 제도를 미리 갖춰놓을 필요가 있다”며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예금토큰 역시 은행이 가진 예금 기반과 신뢰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별도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