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해상 원청교섭 첫발…콜센터 넘어 IT·전산 번지나
중노위 재심 76.1% 노조 측 주장 인정…금융권도 사용자성 판정 현실화 현대해상, 자회사 콜센터 노조와 첫 교섭…평가·고용안정 등 의제 놓고 이견 소비자보호 위해 외주업무 통제할수록 ‘실질적 지배력’ 인정될 가능성 커져
[녹색경제신문 = 한순구 기자]
‘노란봉투법’ 적용을 둘러싼 중앙노동위원회 재심 사건에서 노조 측 주장이 받아들여진 비율이 76%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나면서 금융권의 외주 운영 구조도 시험대에 올랐다.
은행과 카드사에 이어 보험사인 현대해상까지 콜센터 노동자들에 대한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받고 실제 교섭에 착수한 가운데, 향후 분쟁이 IT·전산, 채권관리, 시설관리 등 금융회사의 다른 위탁업무로 확산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4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5월 15일부터 7월 24일까지 지방노동위원회 판정에 불복해 중노위에 재심을 신청한 사건은 64건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중노위가 판정을 내린 46건 중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하거나 노조의 분리교섭 요구를 받아들인 사건은 35건으로 76.1%에 달했다. 사용자 측이 신청한 재심도 전체 64건 중 38건으로 59.4%를 차지했다.
현대해상, 자회사 콜센터 노조와 7월 첫 교섭
금융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례는 현대해상 콜센터 사건이다. 현대해상은 지분 100%를 보유한 현대씨앤알과 현대하이카손해사정에 고객상담 업무를 위탁하고 있다.
두 회사 소속 상담사들로 구성된 공공운수노조 든든한콜센터지부는 개정 노동조합법이 시행된 지난 3월 10일 현대해상에 직접교섭을 요구했다. 현대해상은 상담사들과 직접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교섭 요구 사실을 공고하지 않았다.
이에 노조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시정을 신청했고, 서울지노위는 현대해상이 교섭 요구 사실을 공고해야 한다며 노조 측 신청을 받아들였다. 현대해상은 결정서를 받은 뒤인 6월 4일 노조의 교섭 요구 사실을 공고했다.
현대해상 사건은 단순한 외부 용역업체가 아니라 보험사가 지분 100%를 보유한 자회사 소속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원청 사용자성이 인정됐다는 점에서 파장이 크다.
현대씨앤알과 현대하이카손해사정의 관련 인력은 각각 약 700명과 300명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노조 가입 인원은 현대씨앤알 약 480명, 현대하이카손해사정 약 50명으로 파악됐다. 자회사가 별도 법인으로 상담사를 고용하더라도 본사가 주요 근로조건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직접 교섭 상대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나온 셈이다.
노조는 현대해상에 감정노동자 보호와 휴게시간 개선을 비롯해 평가방식, 고객응대, 고용안정, 근로방식, 복리후생 등을 교섭 의제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금융회사들은 노동위가 사용자성을 인정한 감정노동자 보호와 고객응대 관련 의제를 중심으로 교섭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임금과 성과급, 고용승계, 복리후생 등으로 교섭 범위가 넓어지는 데 대해서는 선을 긋고 있다.
현대해상은 지난 7월 15일 콜센터 노조와 첫 교섭 테이블을 마련했다. 당시 진한승 현대해상 소비자보호총괄책임자(CCO)가 참석했지만, 구체적인 조건을 논의하기보다는 양측의 입장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친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해상이 노동위 판정 이후 교섭 절차에 들어갔다는 점에서는 한화오션이나 중흥건설·중흥토건처럼 곧바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산업계 사례와 차이가 있다. 다만 교섭 의제의 범위를 놓고 노사 간 간극이 커 향후 협상이 순탄하게 진행될지는 불투명하다.
KB국민·하나·KB카드도 사용자성 인정
현대해상에 앞서 KB국민은행과 하나은행, KB국민카드도 서울지노위로부터 콜센터 하청노조에 대한 사용자성을 인정받았다.
서울지노위는 고객센터에서 반복되는 악성 민원의 사전 차단과 통제, 감정노동자 보호조치 개선 등에 대해 원청 금융회사가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한다고 판단했다.
KB국민은행은 지난 7월 2일 하청노조와 첫 교섭을 진행했으며 하나은행도 7월 14일 첫 교섭에 나섰다. KB국민카드 역시 교섭 대표권을 둘러싼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협상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은행·카드에 이어 보험사까지 실제 교섭에 착수하면서 노란봉투법의 금융권 영향은 더 이상 잠재적인 위험에 머물지 않게 됐다. 특히 금융권 콜센터는 원청의 상품과 전산시스템을 이용해 원청 명칭으로 고객을 응대하고, 금융회사가 정한 상담 기준과 소비자보호 절차에 따라 업무를 수행한다.
금융회사가 소비자 보호와 민원 관리,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상담업무를 세밀하게 관리할수록 해당 관리가 상담 노동자의 업무강도와 평가, 휴게시간 등 근로조건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로 해석될 가능성이 커지는 구조다.
콜센터 다음은 IT·채권추심…금융사 ‘통제의 딜레마’
금융권에서는 사용자성 논란이 콜센터를 넘어 IT·전산 운영, 채권추심, 보안, 시설관리 등으로 번질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
개정 노동조합법은 근로계약을 직접 체결하지 않았더라도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를 해당 범위에서 사용자로 본다.
고용노동부도 원청이 하청 근로자의 근로시간이나 휴게시간, 투입 인원, 수당 기준 등을 사실상 결정해 하청업체의 재량을 본질적·지속적으로 제한한다면 ‘구조적 통제’가 인정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일반적인 도급계약에 따라 업무 결과와 보안, 품질을 관리하거나 계약 이행 방법을 협의하는 행위만으로 사용자성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명시했다. 결국 위탁계약의 형식보다 원청이 실제 현장에서 어느 범위까지 결정권을 행사했는지가 판단 기준이 된다.
금융회사의 경우 전자금융사고와 개인정보 유출, 불완전판매, 민원 발생에 대한 최종 책임을 부담한다. 외주업체에 업무를 맡겼더라도 상담 문구와 전산 접근권한, 업무처리 절차, 고객정보 보호 기준 등을 직접 통제할 수밖에 없다.
금융권에서는 이러한 내부통제와 소비자보호 의무가 노동법상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IT·전산 부문에서도 원청이 작업시간과 장애 대응 인력, 시스템 접근 방식, 상주 인원 등을 구체적으로 정한다면 근로시간과 작업환경 등에 대한 교섭 요구가 제기될 수 있다. 채권추심과 시설관리 역시 원청이 실적평가나 인력 배치, 작업 기준에 깊숙이 관여할수록 같은 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직접고용과는 별개…교섭 비용·서비스 리스크 확대
원청 사용자성 인정이 외주 노동자의 직접고용이나 정규직 전환을 곧바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원청이 모든 근로조건에 대해 사용자로 인정되는 것도 아니다.
박수근 중앙노동위원장은 노동위 결정은 원청과 하청노조가 대화하고 교섭하도록 지위를 인정하는 절차적 판단이며, 임금 지급이나 직접고용 같은 실체적 권리·의무까지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 바 있다.
감정노동자 보호에 대한 사용자성이 인정됐더라도 임금과 고용, 복지 등 다른 의제에 대해서는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이 별도로 인정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금융회사가 부담해야 할 교섭 비용과 운영 리스크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여러 위탁업체와 계약을 맺은 금융사는 하청노조별로 교섭창구를 구성하거나 복수의 교섭을 동시에 진행해야 할 수 있다.
콜센터 노조가 요구하는 휴게시간 확대와 상담 인력 충원, 평가방식 변경, 고용안정 등이 반영되면 용역비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교섭이 결렬돼 쟁의행위가 발생할 경우 보험 사고 접수와 카드 분실신고, 금융상품 상담 등 대고객 서비스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금융권이 추진 중인 인공지능 상담 도입과 콜센터 인력 재편도 교섭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인공지능 도입이나 위탁업체 변경으로 고용과 근로조건에 실질적인 변화가 예상된다면 노조가 고용보장이나 전환배치 등을 놓고 교섭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원청이 교섭을 거부할 경우 부당노동행위 문제가 발생하고 노조의 쟁의행위도 가능해지는 만큼, 노사 자율에만 맡기기보다 원청이 어떤 의제에 대해 교섭 의무를 부담하는지 엄격하고 명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혁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도 교섭 의제별로 사용자성을 다투기 시작하면 소송이 크게 늘어날 수 있고, 분쟁이 대법원까지 이어질 경우 2~3년 이상 걸려 사회적 비용이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회사는 소비자보호와 내부통제를 위해 외주업체의 업무를 관리하지 않을 수 없지만, 관리 범위가 넓어질수록 원청 사용자성 논란도 커지는 딜레마가 있다”며 “콜센터뿐 아니라 IT와 채권관리 등 위탁업무별로 본사와 수탁업체의 실제 결정 권한을 다시 점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