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투자 1호 속도…전문가들 “대형 프로젝트 넘어 공급망 금융 설계해야”
한미전략투자공사, 美 제안사업 상업성 검토…국내 기업 참여도 심사 관세·탈중국 규제 따라 먼저 현지화한 배터리·ESS 협력사 금융 부담 커져 “투자금액보다 구조가 중요”…장기계약 기반 차환·보증·운전자금 지원 거론
[녹색경제신문 = 한순구 기자]
한미전략투자공사가 3500억달러 규모 대미투자의 첫 사업 선정을 본격화한 가운데, 미국이 제시한 대형 프로젝트 검토와 함께 현지 공급망에 이미 진입한 국내 기업의 금융 부담도 살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제언이 나온다.
발전소나 액화천연가스(LNG), 원전, 송배전망과 같은 대규모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만으로는 국내 산업에 돌아오는 효과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의 관세와 탈중국 공급망 정책에 대응해 현지 생산시설을 먼저 구축한 배터리·에너지저장장치(ESS) 분야 중견·중소 협력사까지 투자 구조에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美 제안사업 검토 착수…국내 기업 참여도 심사 대상
22일 산업통상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한미전략투자공사는 미국 측이 전달한 대미투자 후보군을 관계 부처·기관과 공유하고 사업별 상업성과 지원 조건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 업계에서는 천연가스발전소와 태양광발전, LNG 설비, 원전·소형모듈원자로(SMR), 송배전망 등이 초기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미국 측 자료가 아직 사업 개요 수준인 만큼 전력 판매가격과 장기 구매계약, 토지·인허가 지원 등 수익성을 판단할 구체적인 자료를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현행 제도는 수익성만을 투자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한미전략투자 사업관리위원회는 상업적 합리성과 함께 법적·전략적 고려사항, 국내 기업 참여 가능성, 미국 정부의 지원 내용, 공급망 안정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도록 설계됐다. 상업적 합리성이 다소 부족한 사업도 국가안보나 공급망 안정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검토할 수 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도 지난달 공사 출범식에서 우수한 기술력을 지닌 국내 기업이 미국 제조업 재편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주문했다. 박종원 한미전략투자공사 사장은 에너지와 조선 등 전략산업에서 양국 산업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제도상으로는 국내 기업 참여와 공급망 효과가 이미 고려 대상에 포함된 셈이다. 다만 현재 진행되는 작업이 미국 측이 제안한 개별 사업을 평가하는 데 집중돼 있어, 미국 현지 투자를 먼저 집행한 국내 공급망 기업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할지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주는 늘었는데 현금은 부족…현지화 기업의 ‘금융 시차’
배터리와 ESS 산업에서는 미국 시장 진입을 위해 생산기지를 먼저 마련해야 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미국이 중국산 배터리와 부품에 대한 관세·보조금 규제를 강화하면서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전기차용 배터리 중심에서 ESS로 사업을 확대하는 동시에 미국 현지 생산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대형 배터리 제조사가 미국에서 수주를 확보하면 배터리팩과 배터리관리시스템(BMS), 모듈 조립, 물류를 맡는 협력사도 현지 생산을 요구받는다.
문제는 수주가 곧바로 현금흐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협력사는 매출이 발생하기 전에 토지와 공장, 자동화 설비, 물류시설, 현지 인력에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생산 초기에는 설비 가동률이 낮고 운전자금 부담도 커 일반 금융기관으로부터 장기·저리 자금을 조달하기 어렵다.
국내 한 중견 ESS 공급망 기업도 주요 고객사의 북미 사업 확대에 맞춰 미국에 배터리팩과 BMS 생산시설을 구축했다. 장기 공급관계와 예상 물량을 기반으로 한 투자였지만, 단기간에 수천억원대 현지 설비투자가 집중되면서 외부 차입 부담이 크게 늘었다. 투자 이전에는 차입금 의존도가 높지 않았지만 공장 건설 이후에는 시설자금과 초기 운영자금을 동시에 조달해야 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이 같은 사례는 부실기업 지원과는 다른 성격을 갖는다. 판매처나 생산 물량이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해외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공급망 정책과 고객사의 현지화 요구에 따라 생산거점을 옮긴 결과이기 때문이다.
금융권에서는 이런 기업의 경우 기존 재무제표만으로 심사하면 급격히 늘어난 차입금과 초기 적자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반면 장기 공급계약과 발주 전망, 고객사의 원재료 공급, 공장 가동률 상승 가능성까지 함께 보면 상환능력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세액공제만으로 초기 투자기업 지원 한계”
전문가들은 대미투자 정책이 투자금 집행에 그치지 않고 국내 기업이 미국 공급망에서 확보할 역할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삼일PwC경영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대미투자의 성패는 단순한 투자 규모보다 ‘구조 설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분석했다. 미국 현지 생산 확대 과정에서 부품·소재 생태계와 중소 협력사가 함께 이동하거나 경쟁력을 잃을 수 있는 만큼, 정부가 국내 공급망 참여를 유도할 제도와 인센티브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형 프로젝트는 건설과 장비 공급, 금융, 인허가, 운영, 장기 구매계약이 결합돼 있어 개별 기업이 독자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이에 정부가 단순한 자금 공급자를 넘어 금융·정책·외교 역량을 결합하고, 프로젝트 발굴부터 기업 참여와 집행까지 연결하는 플랫폼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게 보고서의 제언이다.
배터리 업계에서도 기존 세제지원만으로는 초기 투자 단계 기업의 자금 부담을 낮추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온다.
안정혜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배터리 산업전략 토론회에서 납부할 법인세가 있어야 받을 수 있는 세액공제는 적자 기업이나 초기 투자기업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공장 건설 이후 흑자 전환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배터리 산업의 특성을 지원제도에 반영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희엽 한국배터리산업협회 상무도 ESS 수요 확대와 함께 해외 투자 및 배터리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 지원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안완기 한국공학대학교 석좌교수는 배터리 지원책을 실제 기업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정비하는 ‘실효성’이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이주형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미투자 사업을 평가할 때 미국 측의 토지·인프라·구매계약·인허가 지원뿐 아니라 국내 기업의 참여와 투자금 회수 장치도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미투자 여부를 개별 프로젝트의 표면적인 수익률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美 프로젝트 투자’와 ‘국내 공급망 금융’ 투트랙 거론
전문가 의견을 종합하면 한미전략투자공사의 사업 구조는 크게 두 갈래로 설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현재 추진 중인 미국 제안사업 투자다. 발전소와 LNG 설비, 원전, 전력망 등 미국 측이 제시한 프로젝트의 수익성과 정부 지원 조건을 심사하고 국내 기업의 설계·건설·장비·운영 참여를 투자 조건에 포함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해당 프로젝트나 미국 공급망에 이미 진입한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금융지원이다. 장기 공급계약과 실제 발주 물량이 확인되는 기업에 시설자금과 운전자금을 공급하고, 현지 공장을 짓는 과정에서 조달한 고금리 차입을 정책금융으로 바꿔주는 방식이 거론된다.
정책금융기관이 전액을 직접 대출하기보다는 보증이나 후순위 투자로 위험 일부를 부담해 민간 금융기관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안도 가능하다. 장기 구매계약과 매출채권을 기초로 자금을 공급하거나, 금리·환율 변동 위험을 함께 관리하는 구조도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
다만 지원 대상은 엄격하게 선별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장기 공급계약의 구속력과 발주 물량, 생산시설 가동 일정, 미국 연방·주정부의 세제·인프라 지원, 모기업의 자금보충 능력, 투자금 회수 가능성을 함께 확인해야 한다.
구기보 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교수도 후보 사업별로 상업성에 차이가 있는 만큼 미국 측에 충분한 자료를 요구하고,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보조금 등 지원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급망을 지원한다는 정책 목적이 사업성 검증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투자액보다 ‘한국 기업 몫’ 따져야
한미전략투자공사의 역할을 놓고는 미국에 얼마를 투자했는지보다 국내 기업이 어떤 역할과 수익을 확보했는지를 성과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대기업이 미국 현지에서 대규모 수주를 따내더라도 핵심 부품과 조립, 운영을 현지 또는 외국 기업이 담당하면 국내 산업으로 돌아오는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 반대로 국내 중견·중소기업이 공급망에 함께 들어가 장기간 매출을 확보하면 대미투자 자금이 국내 산업 경쟁력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진다.
삼일PwC경영연구원은 대미투자가 산업별로 기회를 일률적으로 배분하는 구조가 아니라, 개별 프로젝트에서 어떤 기능과 역할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성과가 달라지는 구조라고 분석했다. 정부가 공급망의 병목 구간을 중심으로 투자 우선순위를 정하고 국내 기업이 핵심 모듈과 설계·운영 기능을 담당하도록 구조를 짜야 한다는 것이다.
한미전략투자공사가 미국이 보내온 사업 목록만 평가하는 심사기관을 넘어 국내 기업의 참여 구조를 설계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미국 측 대형 사업에 대한 투자와 함께, 정책 변화에 대응해 현지 생산시설을 먼저 구축한 국내 공급망 기업의 금융 부담을 낮추는 방안도 대미투자 전략에 포함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