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한마디에 은행권 ‘묵은 빚’ 정리 확산…“재기 지원” vs “형평성 논란”
KB국민은행, 시효 남은 취약층 연체채권 1000억원 추가 소각 하나·신한·우리도 장기연체채권 정리 움직임 전문가들 “회수 불능 채권 정리는 필요…정치 압박식 일괄 탕감은 경계해야”
[녹색경제신문 = 한순구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금융권의 장기 연체채권 관리 관행을 강하게 비판한 이후 은행권이 취약계층 연체채권 정리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동안 은행들이 회수 가능성이 낮은 채권을 장기간 보유하면서 소멸시효를 연장해온 관행이 도마에 오르자, 주요 은행들이 채권 소각과 추심 중단, 새도약기금 매각 등 후속 조치에 나서는 모습이다.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고령층 등 사회취약계층의 장기 연체채권 1000억원어치를 6월 중 추가 소각하기로 했다. 지난 3월 335억원 규모의 소액 장기연체채권을 소각한 데 이어 올해 들어서만 총 1335억원 규모의 연체채권을 자체적으로 없애는 것이다.
KB국민은행은 단순 소각에 그치지 않고, 채무정리 이후 차주들이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신용상담도 병행한다는 방침이다. KB금융지주가 운영하는 ‘KB희망금융센터’를 통해 채무정리와 일상 회복 상담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받을 수 없는 빚’을 계속 들고 있던 은행들
은행권에서 말하는 특수채권은 정상적인 회수가 어렵다고 판단돼 별도 관리되는 부실채권이다. 문제는 상당수 채권이 이미 장기간 연체됐고, 회수 가능성이 낮은데도 시효 연장과 추심이 반복됐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기준 5대 은행이 보유한 특수채권은 26조7852억원에 달했다. 은행별로는 우리은행 7조3367억원, 국민은행 6조7065억원, 신한은행 5조3582억원, 농협은행 4조1055억원, 하나은행 3조2783억원 순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5대 은행의 채무조정 금액은 599억원으로 전체 특수채권의 0.2%에 그쳤다.
금융권에서는 “손실 처리한 채권을 장기간 들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 입장에서는 소액이라도 회수 가능성이 있으면 채권을 유지하려는 유인이 있지만, 채무자 입장에서는 10년, 20년 동안 경제활동 복귀가 막히는 결과가 된다”며 “특히 기초수급자나 중증장애인처럼 상환능력이 사실상 없는 차주에게까지 같은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사회적 비용이 더 크다”고 했다.
KB만 움직인 게 아니다
KB국민은행은 이미 지난 3월 금융취약계층 1만2433명을 대상으로 2785억원 규모의 특별 채무감면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대상은 연체 기간 5년 초과, 원금 5000만원 이하 대출을 보유한 사회취약계층과 개인채무자보호법상 채무조정 대상 차주 등이었다. 특히 5년을 넘긴 미수이자를 보유한 차주 2074명에 대해서는 소멸시효 포기 방식이 아니라 잔여 채무를 즉시 소각하는 방식을 적용했다.
신한은행도 앞서 소멸시효 포기 특수채권 2694억원 감면을 시행했다. 하나은행은 민간 부실채권 처리회사인 ‘상록수’가 보유한 장기연체채권 중 하나은행 지분 10%를 한국자산관리공사 새도약기금에 매각하기로 했다. 신한카드 역시 상록수 보유 장기연체채권을 새도약기금에 넘기기로 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상록수 채권이 새도약기금으로 넘어가면 추심이 즉시 중단되고, 상환능력이 없는 기초생활수급자 등은 1년 이내 채권이 자동 소각된다.
우리은행도 1000만원 이하 개인 대출자의 채무 322억원에 대해 추심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농협은행은 별도 대규모 소각 발표가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5대 은행 중 네 번째로 큰 4조1055억원의 특수채권을 보유하고 있어 향후 정리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통령 발언 이후 각 은행이 기존에 갖고 있던 특수채권 관리 기준을 다시 들여다보는 분위기”라며 “회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채권까지 계속 들고 있는 것이 은행 평판 리스크로 번질 수 있다는 판단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재기 지원’이라지만, 논란도 남았다
정부가 만든 새도약기금은 이미 장기 연체채권을 대규모로 사들여 소각하고 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새도약기금은 3월 9일 2차 소각에서 기초생활수급자, 중증장애인, 보훈대상자 등 13만3000명분, 6286억원 규모의 장기 연체채권을 소각했다. 1차 소각까지 합치면 누적 소각 규모는 1조7591억원, 약 20만명분이다. 새도약기금은 매입 시점부터 추심을 중단하고, 이후 소득·재산 심사를 거쳐 소각 또는 채무조정을 진행한다. 소각 기준은 중위소득 60% 이하이면서 생계형 재산을 제외한 회수 가능 재산이 없는 경우다.
전문가들은 취지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으로 본다. 장기 연체 상태에 묶인 취약층이 정상적인 금융거래와 취업, 경제활동에 복귀하지 못하면 개인의 문제가 사회 전체 비용으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 회수 가능성이 낮고 회계상 손실 처리된 채권이라면 은행 입장에서도 추심 비용만 계속 들어갈 수 있다. 이 경우 채권 소각은 ‘선심성 탕감’이라기보다 부실채권 장부를 현실화하는 조치에 가깝다.
한 금융법 전문가는 “상환능력이 완전히 없는 사람에게 시효만 계속 연장하는 것은 채권 관리라기보다 사회적 낙인에 가까워질 수 있다”며 “취약계층에 한정해 채권을 정리하고 금융상담을 붙이는 방식은 제도 취지상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신용평가업계 관계자는 “이미 회계상 손실 인식이 끝난 채권이라면 추가 소각이 은행 손익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다”며 “오히려 부실채권 장부를 현실화하고 사회공헌 이미지를 얻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성실상환자 역차별” 우려도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첫째는 성실상환자와의 형평성이다.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빚을 갚아온 사람 입장에서는 “버티면 탕감받는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금융위도 지난해 보도설명자료에서 이런 논란을 의식해 “지원 대상은 상환능력이 있음에도 갚지 않는 연체자가 아니라 파산에 준하는 수준으로 상환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연체자”라고 설명했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상환능력이 없는 취약계층 지원에는 공감하지만, 기준이 느슨해지면 ‘버티면 탕감된다’는 신호를 줄 수 있다”며 “정책 취지가 좋더라도 대상과 기준을 엄격하게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는 정치권 압박에 따른 금융 의사결정 왜곡이다. 은행이 자체 리스크 기준과 상환능력 심사에 따라 채권을 정리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대통령 발언 이후 금융사들이 앞다퉈 소각 규모를 내놓는 방식은 “정책 호응 경쟁”으로 비칠 수 있다. 한 금융 전문가는 “회수 불능 채권을 정리하는 것과 정치적 분위기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채권까지 포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며 “기준이 불투명하면 결국 비용은 대출금리, 수수료, 신용평가 강화 형태로 다른 금융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고 했다.
셋째는 은행의 책임 문제다. 장기 추심이 사회적 문제였다면, 단순히 대통령 지적 이후 일부 채권을 소각하는 데서 끝낼 게 아니라 애초에 왜 장기간 시효 연장이 가능했는지, 채권 매각과 재매각 과정에서 채무자 보호 장치가 제대로 작동했는지까지 따져야 한다. 개인채무자보호법은 이미 금융회사 자체 채무조정, 연체이자 부담 완화, 채권매각 규율 강화, 불리한 추심관행 개선을 주요 내용으로 시행됐다.
정답은 ‘탕감’이 아니라 ‘선별 정리’
금융권에서는 이번 논란의 핵심이 채권 소각 규모보다 심사 기준에 있다고 본다. 상환능력이 없는 취약차주를 대상으로 한 선별 소각인지, 단순히 여론을 의식한 일괄 탕감인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새도약기금은 장기 연체채권을 매입한 뒤 추심을 중단하고, 소득과 재산 심사를 거쳐 상환능력이 없는 차주의 채권을 소각하는 구조다. 은행 자체 소각도 이와 유사하게 취약계층 여부, 연체 기간, 채권 규모, 회수 가능성 등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다만 은행별 기준이 제각각일 경우 형평성 논란은 계속될 수 있다. 어느 은행의 채무자는 소각 대상이 되고, 다른 은행의 채무자는 제외되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 차원에서 장기연체채권 관리 기준을 보다 명확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금융소비자단체 관계자는 “취약계층 채권 소각은 필요하지만, 은행이 임의로 기준을 정하면 또 다른 사각지대가 생길 수 있다”며 “소멸시효 연장 기준, 채권 매각 기준, 추심 중단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권의 장기연체채권 정리는 이제 시작 단계다. KB국민은행의 1000억원 소각은 대통령 질타 이후 나온 첫 대형 조치 중 하나다. 그러나 신한·우리·하나 등 다른 은행들도 이미 특수채권 감면과 추심 중단, 새도약기금 매각을 검토하거나 진행하고 있어 은행권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번 사안은 취약계층 지원과 금융질서 유지가 동시에 걸린 문제”라며 “무조건 많이 지우는 경쟁이 아니라, 회수 불능 채권을 객관적으로 선별해 정리하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