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호황으로 빚 줄이고 현금 쌓고…설비 발주 잔고 '31조'까지 확대
1분기 차입금 2.9조원 상환, 유동성은 54조원까지 확대 설비 발주 약정 6.7조원→31조원, 차기 투자 실탄 장전
[녹색경제신문 = 정창현 기자] SK하이닉스가 메모리 호황으로 확보한 대규모 현금을 차입금 상환과 유동성 확대에 우선 투입하며 재무 체력 강화에 나섰다. 동시에 앞으로 집행할 설비 투자 발주 잔고를 30조원 넘게 쌓아두며 차기 투자 사이클 준비에도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SK하이닉스가 공시한 올 1분기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1분기 말 기준 차입금은 19조3177억원으로 직전 기말 22조2479억원 대비 2조9302억원 감소했다. 회사채는 1분기에 한 건도 새로 발행하지 않았고, 단기 자금조달도 만기 3개월 안팎의 기업어음(CP) 6000억원에 그쳤다.
반면 현금 곳간은 빠르게 불어났다. 현금 및 현금성자산, 단기금융상품, 단기투자자산 등을 합한 유동성 규모는 직전 34조9422억원에서 54조3298억원으로 19조3876억원(55.4%) 증가했다. 역대 최대 수준이다. 이렇게 빠르게 현금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1분기 영업으로 벌어들인 현금이 26조3301억원으로, 9조원대였던 1년 전과 비교해 약 3배 정도 늘었기 때문이다.
주목할 대목은 또 있다. 같은 분기보고서에서 SK하이닉스가 발주해두고 아직 장부에 자산으로 잡지 않은 설비·시설 구매 약정액이 직전 6조6679억원에서 30조9219억원으로 단숨에 4배 넘게 불어난 것이다. 이 약정액은 계약은 맺었지만 장비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 회계상 자산으로 인식되기 전 단계인 발주 잔고로, 앞으로 1~2년 안에 실제 설비 투자로 집행될 가능성이 큰 항목이다.
규모를 가늠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SK하이닉스의 지난해 연간 설비투자(CAPEX)가 약 41조원이었는데, 그 4분의 3에 해당하는 금액이 이미 발주 잔고로 쌓여 있는 셈이다. 1분기에 실제 집행한 설비투자는 7조3478억원으로 예년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만큼, 따로 쌓인 이 발주 잔고는 앞으로 투자 집행에 한층 속도가 붙을 것임을 시사한다.
결국 올해 1분기 SK하이닉스의 재무 흐름은 ‘재무 안정성 강화’와 ‘차기 투자 준비’라는 두 축으로 요약된다. 호황기 확보한 현금으로 차입금을 줄이고 유동성을 확대하는 동시에, 향후 투자에 활용할 설비 발주를 대규모로 선제 확보한 모양새다.
향후 투자가 어디로 향할지는 지난 4월을 기점으로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1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2026년 설비투자를 HBM과 서버용 D램 중심으로 전년보다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한 발주 약정이 구체적으로 어느 라인을 향한 것인지는 분기보고서상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최근 차세대 후공정 거점인 청주 P&T7 착공, 미국 인디애나 패키징 거점 추진 등 국내외 투자가 잇따르고 있어 발주 잔고가 국내 증설과 미국 거점 양쪽에 걸쳐 있을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호황기 특유의 부담 요인도 나타나고 있다. 매출 확대 과정에서 아직 회수되지 않은 외상매출(매출채권)이 1분기에만 13조원 이상 증가했다. 현재로서는 업황 호조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향후 메모리 업황이 둔화될 경우 자금 회수 속도가 재무 흐름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 메모리 호황기에는 수요 확대에 맞춰 차입을 늘리며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현금을 충분히 확보한 상태에서 선제 발주를 쌓아두는 방식이 눈에 띈다”며 “HBM 중심의 공급 경쟁이 장기전으로 가는 상황에서 재무 안정성과 투자 타이밍을 동시에 관리하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