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주민번호가 나온다니"… 낡은 법에 갇힌 381명의 '그림자 아이들'

소송에 발목 잡힌 출생 유예 아동 381명… 이름은 '미정', 복지는 '전면 배제'

2026-02-20     임채영 기자
출처=임채영

[녹색경제신문 = 임채영 기자]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유기하면 기아(棄兒)로 발견되어 지자체장 권한으로 성과 본을 창설하고 주민등록번호를 받습니다. 하지만 만약 차마 버리지도 못한채 낳기만 하면 법적 소송이 끝날 때까지 아이는 주민등록번호도 없는 유령 신세가 됩니다."

의료기관에서 태어난 아동의 출생 정보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통해 지자체에 자동으로 알리는 출생통보제가 시행된 지 1년 6개월이 지났다. 부모가 고의나 과실로 출생신고를 누락해 아이가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방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가 직접 출생을 파악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제도의 그물망에 포착되고도 낡은 법과 행정의 한계에 부딪혀 온전한 신분을 얻지 못한 아이들이 수백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제도의 맹점은 20일 서영교·전진숙·정춘생·손솔 국회의원과 전국여성법무사회가 공동 주최하고 대한법무사협회가 후원한 '출생통보제 성과와 보완방안 국회토론회'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 폭력 피했지만 "남편의 자녀"로 묶인 아이… 법에 가로막힌 출생신고

조경애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법률구조 제1부장(법학박사)은 토론회에서 낡은 민법 때문에 출생통보제가 오히려 당사자들을 벼랑 끝으로 모는 사례를 소개했다.

가정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온 여성 갑씨는 남편과 이혼 소송을 하던 중 다른 남성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현행 민법은 서류상 이혼 절차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낳은 아이는 무조건 법적인 남편의 자녀로 등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를 피하려면 남편의 핏줄이 아니라는 것을 법적으로 증명하는 복잡한 소송을 거쳐야 한다.

폭력 남편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아이를 올릴 수도, 남편에게 아이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도 않았던 갑씨는 출생신고를 미뤘다. 하지만 출생통보제로 인해 병원의 출산 기록이 정부에 자동으로 넘어가면서, 구청은 갑씨에게 기한 내에 출생신고를 하라는 독촉장을 보냈다.

결국 갑씨는 구청이 직권으로 남편의 밑으로 아이를 등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한 마지막 날 급하게 법원에 남편의 자녀가 아님을 확인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그 접수증명원을 구청에 제출해야만 했다. 당장 소송 요건이 맞지 않더라도 일단 법원 접수증이 있어야 지자체의 강제 등록을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이 현실의 가족 형태를 따라가지 못해 빚어진 상황이다.

◇ 소송에 발목 잡힌 381명, 이름조차 "미정(未定)"

2026년 1월 15일 자로 법원행정처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7월 출생통보제 시행 이후 출생신고 의무자가 신고를 하지 않아 직권출생등록이 유예된 아동은 총 381명이다. 이 중 92.9%에 해당하는 354건이 친생부인 허가 청구(199건), 친생부인의 소(96건), 아버지를 정하는 소(50건) 등 친자관계 관련 소송 때문이다. 출생 사실을 국가가 인지했음에도, 누구의 자녀인지 법적으로 다투느라 아이를 무적자(無籍者)로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직권등록이 이루어진 아동의 상황도 열악하다. 직권출생등록이 완료된 아동 16명 중 9명(56%)의 이름은 가족관계등록부에 "미정(未定)"으로 기록됐다. 또한 직권으로 기재되더라도 주민등록번호가 자동으로 부여되지 않아 예방접종, 건강검진, 보육료 지원 등 필수적인 사회보장제도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 민법 개정부터 행정 연계까지… 사각지대 해소 방안

토론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제도의 사각지대를 메우기 위해 낡은 법망을 현실에 맞게 촘촘히 재조립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가장 시급한 과제로는 부모의 혼인 상태를 기준으로 삼는 현행 제도의 탈피가 꼽혔다.

조경애 부장은 "출생신고 서식상 혼인 중의 출생자와 혼인 외의 출생자 구별 표기를 삭제하여 차별적 사고를 고착화하는 낙인효과를 방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 역시 "이혼 후 300일 내 출생하더라도 모가 재혼 중이거나 사실혼 관계가 인정되면 현 배우자나 생부를 부로 추정하는 예외 규정 신설이 필요하다"며 합리적 개선을 강조했다.

법 개정과 더불어 신속한 행정 연계망 구축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혁준 전국여성법무사회 여성법연구위원장은 "출생신고 완료 전이라도 전산관리번호만으로 바우처 및 급여 신청이 가능하도록 행정 연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병원 밖 출산을 포착하기 위해 119 구급대를 신고의무자에 포함할 것을 주문했다.

국적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채희옥 초록우산 아동옹호사업본부 옹호사업1팀장은 "외국인 아동을 위한 별도법 제정보다는 내국인과 동일하게 가족관계등록법을 개정하여 이들을 포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 부처 간 칸막이와 법적 정합성… 풀지 못한 숙제

제도의 허점이 드러났음에도 즉각적인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에는 부처별 실무적 한계와 법적 충돌 우려가 자리 잡고 있다. 현장에 참석한 정부 관계자들은 행정 시스템의 한계를 명확히 짚었다.

외국인 아동도 내국인과 동일하게 가족관계등록법 체계에 편입하자는 주장에 대해 황혜영 법원행정처 가족관계등록과 사무관은 "국제규범은 외국인 아동의 인권 보장을 위한 것이지 외국인 신분 관계까지 공시해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라며 "외국인 아동이 성년이 되어 해외에서 가족관계를 형성할 경우 한국 정부가 이를 파악할 권한이나 능력이 없어 사실상 정확한 공시가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생부의 단독 출생신고 한계에 대해서도 황 사무관은 "혼인 외 출생의 경우 법적인 부자 관계는 아버지의 인지가 있어야만 형성이 된다"며 "아직 법적으로 아버지가 아닌 생부를 신고 의무자로 규정하는 것은 현행 법 체계상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119 구급대의 출생 통보 의무화와 관련해서는 "만약 119 구급대에 의해 출생 통보가 이뤄지게 되면, 현행 규정상으로는 위기 임산부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지역 상담기관에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며 현행 신원노출을 꺼리는 임산부의 보호출산제와의 충돌 우려를 표했다. 출생신고 서식상 "혼인 중" 혹은 "혼인 외" 표기 삭제 주장에 대해서도 "가족관계등록법은 민법의 절차법으로, 해당 표기가 기재되지 않는다면 공무원이 혼인 여부 소명 자료를 확인할 근거가 사라진다"고 덧붙였다.

주민등록번호 대신 사회보장 전산관리번호를 개인 식별번호로 삼아 선제적 복지를 제공하자는 제안에 대해 최영준 보건복지부 출산정책과장은 행정적 한계를 토로했다. 최 과장은 "해당 번호를 궁극적인 식별 번호로 사용하는 것은 현행법상 근거가 없고, 실무적으로도 다부처 간 논의가 필요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중앙정부 사업과 달리 지자체가 자체 예산으로 지급하는 출산장려금 등은 주민등록번호가 나오지 않으면 받지 못하는 실무적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