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C, 유리기판 양산 시점 '안갯속'…기술 난제 부닥쳤나
당초 25년 말 목표에서 26년 초로 연기 이번 컨콜서도 '듀 데이트' 제시 못 해
[녹색경제신문 = 문슬예 기자] SKC가 선두를 달려온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기술 유리기판(Glass Core substrate) 양산 스케쥴이 안갯속으로 빠지는 모양새다.
당초 지난해 말로 제시했던 양산 목표가 한 차례 미뤄진 상황에서, 최근 실적 컨퍼런스 콜에서는 상용화 시점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던스조차 제시하지 못했다. 업계에서는 SKC가 기술적 난제와 고객 요구 변화에 직면하면서 불가피하게 내부 전략 수정에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5일 진행된 SKC의 4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박동주 SKC 최고재무책임자(CFO)는 “글라스 기판의 상용화 시점이 시장의 기대 대비 다소 지연되고 있다”며 “기존에 없던 제품인 만큼 개발이 진전될수록 고객사 요구가 구체화하고 있으며, 다양한 사용 환경을 전제로 한 신뢰성 테스트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SKC는 미국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와 합작한 자회사 앱솔릭스(Absolics)를 통해 유리기판 개발의 선두주자로 평가받아 왔다. 지난 2021년 개발에 착수해 2024년에는 미국 조지아 주에 세계 최초 유리기판 양산 공장을 준공했다. 특히 경쟁사 대비 수년 앞선 ‘2025년 말 양산’ 목표를 제시해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2027년 이후 양산을 제시한 삼성전기·LG이노텍 등 후발주자들과의 뚜렷한 차별점으로 꼽혀왔다.
그러나 해당 일정은 지난해 한 차례 수정됐다. SKC는 지난해 상반기 2025년 말이었던 양산 시점을 2026년 초로 조정했다. 이어 양산 시점이 임박한 이번 컨퍼런스콜에서도 명확한 ‘듀 데이트(due date)’를 제시하지 않았다.
SKC 관계자는 “예상하지 못했던 추가 검증 항목들이 발생하면서 개발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며 “정식 양산 출하 시점은 당겨질 수도, 늦어질 수도 있는 상황으로 현재로서는 시점을 확정해 언급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SKC 측이 설명하는 유리기판 양산 지연의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고객사들이 데이터센터, AI 가속기 등 용처별로 상이한 사용 환경을 전제로 한 신뢰성 테스트를 요구하면서 검증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오가닉 기판과 달리 유리기판은 내구성·핸들링 등에서 높은 신뢰성이 요구돼 테스트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또 하나는 SKC가 지향하는 임베딩(Embedding) 방식의 하이엔드 유리기판 개발 전략이다. 임베딩 방식은 유리기판 내부에 회로와 구조물을 집적하는 고난도 기술로, 성능과 신호 특성에서 유리하지만 공정 안정성과 수율 확보에 시간이 필요하다.
SKC는 “논 임베딩(non-embedding) 방식은 상대적으로 상용화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영역”이라며 “최근에는 고객 수요를 감안해 임베딩과 논 임베딩 제품을 병행하는 투트랙 전략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당초 하이엔드 중심에서 보다 유연한 제품 전략으로 수정하겠다는 의미다.
SKC가 이번 컨콜에서 밝힌 자사의 유리기판 사업 페이즈(phase)는 고객사에 공급한 프로토 샘플의 성능과 신뢰성을 검증하는 단계다. SKC는 주요 공정에 대한 핵심 기술을 확보해 프로토 샘플을 고객사에 제출했으며, 시뮬레이션 평가를 통한 고객사의 초기 피드백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는 SKC가 그동안 설명해 온 ‘시생산 기반 검증 단계’의 연장선으로 상용화 단계로의 뚜렷한 진전은 파악되지 않는다는 평가다.
유리기판 핵심 거점인 자회사 앱솔릭스의 리더십에도 변화가 있었다. SKC는 지난해 12월 강지호 대표를 신임 CEO로 선임하며 경영진 교체를 단행했다. 강 대표는 인텔과 SK하이닉스를 거쳐 온 인물로, CMP 및 첨단 반도체 패키징 공정을 담당해 온 반도체 기술 전문가다.
신임 대표 선임에 대해 SKC는 “현지에서 상근하며 기술 중심 의사결정을 수행할 수 있는 실행형 리더십이 필요했다”는 입장이지만, 업계에서는 양산 지연과 실적 부진에 따른 문책성 인사 성격도 배제할 수 없다는 해석이 나온다. 박원철 전 SKC 대표가 지난해 말까지 SKC와 앱솔릭스 CEO를 겸직했다. 미세 공정 전문가인 강 대표 선임을 통해 양산 상용화에 속도를 내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또한 업계 일각에서는 유리기판 사업 전반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여전하다. AI 가속기 등 일부 고성능 영역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파손 위험과 높은 제조 비용으로 적용 가능한 용처가 제한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유리기판은 기술적으로 지향해야 할 미래 방향임은 분명하지만, 아직 대량 양산을 논하기에는 한참 이르다”며 “AI 가속기처럼 극단적인 성능을 요구하는 영역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파손 위험과 가격 부담으로 범용 시장 확대에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차세대 먹거리인 유리기판을 향해 경쟁사들 역시 속도를 높이고 있다. 삼성전기는 일본 스미토모화학 그룹과 핵심 소재인 ‘글라스 코어(Glass Core)’ 공동 생산을 위해 손을 잡았다. 삼성전기는 세종사업장에 파일럿 라인을 구축해 글라스 코어 시제품을 생산 중이며 2027년 이후 합작법인을 중심으로 본격 양산을 추진할 계획이다.
LG이노텍은 구미사업장에 6000억원을 추가 투입해 FC-BGA와 유리기판 개발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글로벌 고객사를 대상으로 시제품 개발을 진행 중이며 양산 시점은 2028년 이후로 제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