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이재용 회장의 탁구채, 삼성의 시간

2025-12-17     조영갑 기자
이건희

강화도로 나들이를 갔다가 흥미로운 책방을 발견했습니다. 이른바 '공유책방' 컨셉의 서점인데요, 개인 출자자 혹은 독립출판사들이 소액을 출자해 작은 책장을 얻고, 헌책을 팔아 이익을 서점 측과 쉐어하는 방식의 책방입니다. 책방을 소개하려던 것은 아니고, 책방 한 코너에서 발견한 '진귀한' 에세이가 이 글의 모티베이션입니다. <이건희 에세이 (부제)생각좀 하며 세상을 보자>. 

IMF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7년 초판이 발간된 책입니다. 당시 정가는 6500원. 일찍 절판된 탓에 이건희 회장(선대 회장)이 별세한 2020년 중고가만 약 10만원에 육박했다네요. 거인의 일갈("생각좀 하며 세상을 보라!")이 필요한 시기였던가 봅니다. 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이예요, 비매품입니다"라며 구매 의사에 일갈을 가했습니다. 각설. 가장 눈에 띄는 챕터는 아들(이재용 회장)과의 일화입니다. 선대 회장은 잘 알려진 스포츠광이었습니다. 

"나는 이따금 아이들과 탁구를 친다. 하루는 아들이 평소 사용하던 펜홀더형 탁구채를 셰이크핸드형으로 바꿨다. 웬일이지 하면서 게임을 했는데 평소 점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점수 차로 지고 말았다. 게임을 끝낸 후 아들과 얘기를 하며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중략하면 이렇습니다. 셰이크핸드형 탁구채는 공의 접촉이 넓은 반면 힘이 분산돼 수비형 선수에게 적합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언제부터인가 힘 좋은 공격형 유럽 선수들이 셰이크핸드 탁구채를 쓰면서 스매싱의 파괴력을 높이기 시작했다는 거죠. 그 결과 80년대 후반 세계 최강 중국을 넘기도 했다고요. 그 후로 셰이크핸드=수비라는 인식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곁들입니다.  

선대 회장은 다시 일갈합니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펜홀더형은 공격형, 셰이크핸드형은 수비형이라는 고정관념을 뒤집어 상대 전략의 허를 찌르는, 다시 말해 공격과 수비의 구별 없이 공격 위주로 게임을 펼치는 쪽이 승리할 기회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들의 얘기를 듣고 개인의 생활이나 기업 경영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개인이나 기업이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수비적으로 웅크리고 있으면 결코 성장할 수 없다. 결국에는 있는 것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진다. 선취골을 따냈다고 수비에만 치중하다가 상대 팀의 줄기찬 공격에 무너지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축구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재용 회장의 탁구 실력이 출중한지 확인해 볼 길은 없습니다. 다만, 선대 회장이 아들의 라켓 교체를 보면서 이기는 기업의 암묵지를 떠올린 것과 아들의 승부사적 기질을 은연 중에 내비친 것은 눈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습니다. 사소한 일상의 변화를 경영의 논법으로 치환시키는 선대 회장의 촉수에도 감탄했습니다.

선친의 라켓을 이어 받은 이재용 회장은 다시 자신의 라켓을 꺼내들고, 그랩을 고쳐잡는 모양새입니다. 선친을 이겼던 셰이크핸드 그랩으로 10년 간 방어와 수성에 치중했다면, 지난해와 올해 '닥공'의 야성을 완전히 찾은 것 같습니다. (*탁구 교본에 따르면 셰이크핸드는 손목을 360도로 쓸 수 있어 앞면은 물론 뒷면으로 드라이브, 푸시, 플릭, 블록, 쇼트 등 다채로운 기술을 구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유빈 선수가 전형적인 올라운드 셰이크핸더로 분류된다고 하네요.)

우선 전진 배치한 인사와 그 세부 갈래 인사를 보면 수성이 아닌 공성의 결기가 물씬 느껴집니다. HBM 시장에서의 실기를 단숨에 만회하겠다는 결기겠죠. 그간 이 회장의 지근거리에서 리스크 관리의 대명사로 꼽혔던 정현호 부회장(사업지원TF 실장)이 2선으로 후퇴하고, 공격형 CFO로 꼽히는 박학규 사장(사업지원실장)이 중용된 것이 대표적입니다.

박 사장은 경영진단 소방수로 꼽힙니다. 미전실 경영진단팀장(2014~2017) 재직 기간 동안 제일기획, 삼성전자 VD 사업부 등의 사업 조정을 지휘하면서 보여준 칼같은 업무 솜씨가 당시 이 부회장의 눈에 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SDS, 삼성전자 DS부문, 삼성전자의 사업운영, 재무를 총괄하면서 명성을 날렸죠. 테크 리포트를 여전히 탐독하는 걸로 전해집니다.

박 사장 휘하의 M&A팀장을 맡은 안중현 사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W 엔지니어로 입사했지만, 삼성전자, 미전실 전략기획 파트에서 내공을 쌓으며 역사적인 M&A(하만 인수, 한화·롯데 빅딜)에 역할을 합니다. 테크에 두루 밝은 재무통과 엔지니어 출신 M&A 전문가. 뭔가 재밌는 그림이 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전영현 부회장(DS부문장)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삼성이 자존심을 구기게 된 1b 공정(약 12nm급) 노드를 건너 뛰어 1c(약 10nm 초반) 노드를 밀어붙이면서 HBM 시장에서 격차를 최소화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무엇보다 최근 2나노(SF2, SF2P) 파운드리 공정 관련 고객사 군을 다채롭게 구축하면서 TSMC의 위기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TSMC는 ASE, Amkor 등 외주화를 통해 CoWoS 병목을 풀어 '삼파'의 공성에 대응한다는 방침입니다. 

무엇보다 이재용 회장 자신의 변화상에도 방점을 찍고 싶습니다. 이건 젠슨황의 힘을 빌려야 겠네요. 몇년 전만 해도 이 회장의 대중 출연은 포토라인 앞이 더 익숙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젠슨황이 촉발한 치킨회동은 대한민국 재계에 유례없던 '오너테인먼트' 신장르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회장과 정의선 회장 역시 젠슨황의 어깨를 겯고 전면에 나서면서 대중의 환호를 이끌어 냈습니다.

다소 얼어 있는(?) 정 회장과 달리 이 회장은 대중의 시선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너가 직접 회사 주식(NVDA)을 팔고, 경쟁사 제품(아이폰)을 저격하는 장면이 한국 재계사에서 자주 있었던가요? 이 회장은 대중과의 접점을 계속 늘리고 있습니다. 

오너가 대중과 직접 대면하고 "우리 회사에 투자하라"고 말하는 시대가 왔다고 하면 과언일까요? 기업가치를 밀어올리는 키팩터는 당연히 사업, 재무적 펀더멘털과 모멘텀이겠지만, 이런 류의 연성가치도 충분히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적으로 정(正)드라이브를 걸고, 자신을 활용해 백핸드 푸시를 넣은 셈입니다. 지금까지는 분위기가 좋습니다. 

최근 삼성그룹 홍보맨들을 만나면 눈에 핏발이 다소 서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모종의 결기가 느껴집니다. '다시 우리의 시간이 오고 있다'는 의미일까요? 한 관계자는 "아유 그동안 이 정도 X팔렸으면 됐죠. 내년은 연초부터 재밌는 일들이 많을 겁니다"라며 소주잔을 털어 넣었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다시, 선대 회장의 일갈로 마무리합니다.

"세간에서는 삼성이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고 하지만 나는 임직원들에게 돌다리는 커녕 나무다리라도 있으면 건너가라고 한다. 위험을 각오하고 선두에서 달려가야 기회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유 있는 실패는 반기지만 터무니 없는 실패,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이유 있는 실패까지 나무라면 조직 내 창의성이 말살되고, 복지부동의 보신주의만 남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 자체가 아니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조영갑 산업부장

강화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