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개 금융기관 '내부통제 구멍'...금감원 '겸직 사각지대' 경고
- 대형 증권사 절반 '대표·의장 겸직'...각자대표 8개사 책무 배분 혼선도 심각 - 메리츠·KB증권 등 각자대표 혼선...DLF 사태 '책임 떠넘기기' 전례 재현 우려 - 7월 책무구조도 정식 시행 앞두고...제도 실효성 확보 '험로'
[녹색경제신문 = 나아영 기자] 금융감독원이 대형 금융투자회사와 보험사의 절반 가까이가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해 내부통제 견제 기능에 허점이 생길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과거 라임·옵티머스 사태와 DLF 사태 같은 대형 금융사고에서도 이사회 독립성 부족과 임원 간 책임 떠넘기기가 문제로 지적됐던 터라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7월 정식 도입을 앞둔 책무구조도 제도의 실효성 확보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26일 금융감독원이 대형 금투·보험사의 책무구조도 시범운영 현황을 공개한 결과, 절반 가까운 회사가 내부통제 견제 장치에 구멍이 뚫린 채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7월 정식 시행을 앞둔 책무구조도 제도의 핵심인 견제와 균형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시범운영 컨설팅을 완료한 대형 금투·보험사 53개사 중 25개사(47.1%)가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금투사는 27개사 중 11개사(40.7%), 보험사는 26개사 중 14개사(53.8%)가 겸직 중이었다.
현재 메리츠증권의 장원재 대표이사, KB증권의 김성현 대표이사 등이 이사회 의장을 겸임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험업계에서는 한화생명의 여승주 대표이사, 메리츠화재의 김중현 대표이사 등이 이사회 의장을 겸직 중이다. 문제는 이런 겸직 구조가 책무구조도 제도의 근본 취지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이사는 내부통제 등 전반적 집행과 운영 책임을 지는 반면 이사회 의장은 대표이사의 총괄 관리의무 이행을 감독해야 한다. 한 사람이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 자신이 자신을 감독하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진다.
특히 과거 대형 금융사고는 이런 구조적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2019년 라임자산운용 사태와 2020년 옵티머스자산운용 사태 당시 금감원 조사에서 이사회가 경영진에 대한 견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사태 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됐다. 대표이사가 이사회를 주도하면서 리스크 관리와 내부통제에 대한 독립적 감시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자대표 체제를 운영하는 8개사의 책무 배분 혼선도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미래에셋증권(김미섭·허선호), KB증권(김성현·이홍구), 메리츠증권(장원재·김종민), 교보증권(박봉권·이석기), 유진투자증권(고경모·유창수), SK증권(전우종·정준호) 등이 각자대표 체제를 운영 중인데, 금감원은 회사별 책무 배분 기준이 상이해 실무상 혼선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일부 회사는 각자대표별로 소관 업무에 한정해 책무를 배분하는가 하면, 다른 회사는 책무의 성격에 따라 어느 일방에게 단독 배분하거나 모든 대표에게 배분하는 혼합 방식을 채택했다. 기준이 통일되지 않은 셈이다. 2019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에서도 각자대표 간 책임 떠넘기기 현상이 발생했던 전례가 있어 업계 우려를 키우고 있다.
보험업계 역시 마찬가지다. 교보생명의 신창재 회장과 조대규 대표이사 사장, 미래에셋생명의 김재식 대표이사 부회장과 황문규 대표이사 등이 각자대표 체제를 운영하고 있어 책무 배분 기준 혼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함께 책무의 중층적 배분으로 인한 중복 문제도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났다. 상당수 금투·보험회사가 보고를 받고 의사결정 권한을 행사하는 상위 임원이 아닌 하위 임원에게 실질적인 내부통제 책임을 배분해 내부통제 효과성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회사는 부문장과 본부장에게 동일한 업무에 대한 책무를 중복 배분해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주요 임원에 대한 책무 배분 누락 사례도 다수 발견됐다. 일부 회사는 비상임이사를 책무배분 대상에서 당연히 제외하거나 전결권이 없다는 이유로 책무를 배분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경영 전략과 사업계획 수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장급 임원에게도 전결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책무를 배분하지 않은 사례까지 있었다.
이런 문제점들에 대응해 금감원은 겸직을 유지하는 회사들에게 이사회 산하 내부통제위원회를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하는 등 실효성 있는 내부통제 장치를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실제로 한 회사는 금감원의 권고를 받아들여 내부통제위원회를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하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런 임시방편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적 반응이 나온다. 한 금융회사 관계자는 "과거 DLF 사태에서 보듯 각자대표 간 책임 떠넘기기가 재현될 수 있어 우려스럽다"며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 겸직 문제는 단순히 내부통제위원회 구성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며 "라임·옵티머스 사태의 교훈을 살려 근본적인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일부 업계에서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각자대표 체제는 분업화가 심한 현재 금융업 특성상 경영 효율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중요한 것은 명확한 책무 배분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노출되면서 7월 3일 예정된 대형 금투·보험사의 책무구조도 정식 시행에 차질이 우려되는 모양새다. 현재 1단계로 올해 1월 3일부터 전체 은행·금융지주회사에 대한 시행이 완료됐으며, 2단계로 7월 3일부터 자산 5조원 이상 금투사와 보험사 67개사가 시행 대상이다.
금감원은 향후 업권별 시행 일정에 맞춰 준비현황 점검과 설명회 개최, 운영실태 점검 등을 통해 새로운 제도의 안정적 안착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오는 29일에는 시범운영에 참여하지 않은 대형 금투·보험사 8개사를 대상으로 간담회를 개최하고, 6월 19일에는 금투·보험사 대상 설명회를 열 예정이다.
책무구조도는 3단계로 내년 7월 3일부터 2단계 시행 외 금투·보험 및 여전사·저축은행이, 4단계로 2027년 7월 3일부터 나머지 여전사·저축은행이 시행될 계획이다. 금감원은 "책무구조도 제도 도입이 경영진의 내부통제 책임을 하부로 위임할 수 없다는 원칙을 구현하는 긍정적 계기"라고 평가했지만, "실효성 있는 운영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