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 '금융판 중대재해법' 도입 임박...대형사 '선제대응'-중소형사 '아우성'
- SBI저축은행, 내년 의무화 앞두고 선제적 책무구조도 구축 착수 - 중소형사 '경영난에 추가 부담'...저축은행중앙회, 표준안 마련 TF 구성 - 모아저축은행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내부통제 강화 필요성 부각
[녹색경제신문 = 나아영 기자] 저축은행 업계가 내부통제 강화를 위한 책무구조도 도입 준비에 착수했다. 내년 7월 의무화를 앞두고 대형 저축은행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는 반면, 중소형 저축은행들은 경영난 속에 대응 여력 부족으로 난색을 표하고 있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SBI저축은행은 최근 국내 회계법인과 법무법인을 대상으로 책무구조도 설계 컨설팅 입찰 공고를 냈다. SBI저축은행 측은 이르면 5월 말부터 책무구조도 프로젝트에 착수해 연내 완료할 계획이다.
SBI저축은행은 단순한 서류 작업에 그치지 않고, 시스템통합(SI) 업체 자문을 통해 책무구조도를 실시간으로 점검할 내부 전산 시스템까지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지난해 말 기준 총자산 14조289억원 규모의 SBI저축은행은 비금융지주계열 저축은행 중에서는 가장 먼저 책무구조도 구축에 나섰다.
책무구조도란 금융사 임원이 수행해야 할 내부통제 책무를 명시한 문서로, 내부통제 관리 의무 소홀 시 금융사고 발생 책임을 해당 임원이 져야 한다. 최고경영자(CEO)도 예외가 아니어서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란 별칭으로도 불린다.
지난해 7월 시행된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금융권에 업권별 책무구조도 제출을 의무화했다. 은행과 금융지주는 이미 지난 1월 금융당국에 책무구조도를 제출 완료했으며, 자산 5조원 이상 대형 증권사와 보험사는 오는 7월까지 제출해야 한다.
저축은행은 자산 규모에 따라 제출 시기가 달라진다. 자산 7000억원 이상 저축은행은 내년 7월까지, 7000억원 미만은 2027년 7월까지 책무구조도를 제출해야 한다. SBI저축은행의 경우 자산 규모상 늦어도 내년 안에 책무구조도를 당국에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KB저축은행과 신한저축은행 등 금융지주 계열 저축은행들 역시 책무구조도 준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KB저축은행은 연내 책무구조도 작성을 목표로 준비 중이고, 신한저축은행도 내부 관리 시스템 구축에 들어간 상태다. 금융지주 계열 저축은행들은 모회사의 시스템과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준비가 수월한 편이다.
이와 달리 중소형 저축은행들은 책무구조도 도입에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업계에서는 "제출 기한이 아직 있어 당장 도입 논의보다 다른 금융권의 시행 사례를 지켜보는 분위기"라는 반응이 나온다. 특히 PF(프로젝트파이낸싱) 부실과 유동성 압박으로 경영난을 겪는 저축은행들에게 내부통제 시스템 구축은 현실적으로 버거운 과제라는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해 금융당국과 저축은행중앙회는 중소형 저축은행의 책무구조도 도입을 지원하기 위한 표준안 마련에 나섰다. 저축은행중앙회는 이달 중 책무구조도 표준안 제정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할 예정이며, 금융지주 계열 저축은행을 포함한 5~7개 저축은행이 이에 참여할 전망이다.
TF는 은행권의 사례를 참고해 저축은행에 특화된 맞춤형 표준안 개발에 주력할 방침이다. 현재 신한저축은행, KB저축은행 등 대형사 5개를 제외한 68개 저축은행이 이 표준안 사용에 동의했다. 저축은행중앙회 측은 내년 1분기까지 표준안을 마련해 현장 가이드라인으로 제공할 계획임을 밝혔다.
책무구조도 도입 필요성은 최근 발생한 모아저축은행의 22만명 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으로 더욱 부각됐다. 해당 사건에서는 모아저축은행 전·현직 직원이 대출 조회 고객 개인정보를 불법 유출했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저축은행 측이 경찰 수사 착수 이후에야 유출 사실을 인지했다는 점이다. 자산 규모 수조원대 대형 저축은행에서 이러한 사고가 발생했다는 점은 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강민국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6년간 국내 금융업권의 금융사고는 468건, 8423억원에 달했다. 업권별로는 은행이 4595억원으로 가장 규모가 컸고, 저축은행은 571억원(6.8%)으로 3위를 차지했다. 저축은행 금융사고 중에서는 사기가 233억원(33건)으로 가장 많았다.
강민국 의원은 "최근 6년간 금융사고 규모가 8500억원에 달하고 배임·횡령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임직원의 준법의식과 내부통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방증한다"며 업권별 맞춤형 내부통제 방안 수립을 촉구했다.
금융당국도 책무구조도 제도의 연착륙을 위한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올해 1월 비조치의견서를 통해 책무구조도 시범 운영 기간 중 금융사고 발생 시에도 지배구조법에 따른 책임을 묻지 않기로 결정했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저축은행 관련 제재 사례는 총 34건으로, 대주주 등에 대한 재산상 이익 부당 제공(12건)과 사업자 주택담보대출 부당 취급(9건) 등이 주요 유형이었다.
한 중소형 저축은행 관계자는 "책무구조도 도입 취지는 공감하지만, 현재 경영난 속에서 추가 인력과 시스템 투자는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대형사와 달리 전문인력과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 제도를 도입하려면 현장의 어려움을 고려한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