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반도체 50일의 반란 '절반의 승리'...뒷배엔 마이크론
ASMPT 밀어내고 한화세미텍과 나란히 공급계약 마이크론과 밀월 심화, 최대 500대 공급 협업설도
[인사이트녹경 = 조영갑기자] SK하이닉스의 TC본더 공급망 다원화에 맞서 CS(서비스)인력을 철수하는 등 초강수로 맞섰던 '한미반도체의 반란'이 약 50일 만에 한미 측의 승리로 귀결됐다. HBM 12단 관련 공급망 배제설 까지 대두됐던 상황에서 곽동신 한미반도체 회장은 고객사 압박 전술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일정 부분 쟁취했다는 평가다.
다만, 곽 회장이 SK하이닉스 측에 CS인력 복귀의 전제 요구사항으로 내밀었던 '한화세미텍 배제'는 달성하지 못했다. 신규 TC본더의 단가 역시 기존 공급가 대비 25~28% 수준 증액을 요구했으나 기존 시장에 알려진 단가를 책정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절반의 승리라는 평가가 나오는 대목이다.
19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한미반도체는 지난 16일 SK하이닉스와 428억원 규모의 HBM 제조용 TC본더(DUAL TC BONDER GRIFFIN)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오는 7월까지 공급을 진행한다. 한미반도체는 정확한 공급 대수를 표기하지는 않았으나 14대 가량을 납품하는 공급 계약으로 파악된다. 신규 라인 투자가 집행된 SK하이닉스 청주 사이트로 입고될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 한미반도체의 신규 경쟁 제조사로 부상한 한화세미텍(한화비전) 역시 공시를 내고, SK하이닉스에 385억원 규모의 TC 본더 공급계약을 알렸다. 12대 정도로 알려졌다. 역시 청주 사이트로 입고되며, 계약 기간은 한미반도체 건과 동일하다.
눈에 띄는 점은 한미반도체의 계약액은 부가세(VAT)를 포함한 수치고, 한화세미텍은 제외했다는 점이다. VAT를 포함하면 한화세미텍의 계약 총액은 423억원 가량이 된다. 한미반도체는 대당 약 30억원 가량, 한화세미텍은 35억원 가량의 공급단가를 책정 받은 셈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공급 계약 건은 SK하이닉스의 고심이 짙게 묻어 있었다는 평가를 내린다. 특히 같은 날 특허소송을 진행 중인 경쟁사에 동일한 공급계약이 나왔다는 점은 한미반도체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공급망 다원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공표한 거라는 분석이다. 계약액을 양사가 달리 표기한 것 역시 한미반도체의 자존심을 안배한 차원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총액의 외형은 한미반도체가 더 크다.
한미반도체는 지난 4월 초부터 SK하이닉스를 상대로 TC본더 공급가 인상, CS인력 철수 등 잇따라 강수를 두면서 일종의 '농성전'을 펼쳐왔다. 4월 중순 SK하이닉스 측 고위 임원이 한미반도체 본사를 내방해 곽 회장과 수습책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핵심 사안은 한화세미텍의 공급망 배제다.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은 TC본더 특허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한화세미텍이 SK하이닉스가 추진하는 공급망 다변화의 키맨인 까닭에 한미반도체는 최근 신규 물량을 한화세미텍과 나눠 갖는 수준에서 SK하이닉스와 합의를 봤다. 대신 기존 2혹은 3밴더 대체재로 평가됐던 싱가포르의 ASMPT는 한미반도체의 재입성으로 SK하이닉스 공급망에서 배제될 처지에 놓였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당초 SK하이닉스의 공급망 다변화 구상은 7대 3 정도의 비율로 한화세미텍과 ASMPT 제품을 도입하려는 것이었으나 한미반도체가 CS인력 철수를 계기로 압박 강도를 높이자 ASMPT 물량에 더해 추가 물량을 한미반도체에 배정하는 방식으로 기존 계획을 선회했다"고 강조했다. 서비스 대응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ASMPT는 공급망에서 탈락하고, 한화세미텍에 배정됐던 포캐스트 역시 일정 부분 한미반도체로 갔다는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 내 TC본더 독점 밴더의 지위는 상실했지만, 이번 공급 계약으로 집토끼(SK하이닉스)를 지키면서 산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마이크론이라는 산토끼다. 마이크론은 현재 월 20K(2만장) 수준의 캐파를 연내 60K 수준으로 늘리겠다고 공표한 상태다. 올해 싱가포르, 미국, 일본 신규 공장을 가동, 글로벌 2위(생산량 기준)에 올라서겠다는 포부다.
각 사의 사정에 밝은 업계 관계자는 "마이크론의 존재가 없었다면 이번처럼 한미반도체는 모험에 가까운 반기를 들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마이크론이 공격적으로 HBM 증산을 예고하면서 장기적으로 수백 대 수준의 TC본더 도입을 한미반도체와 협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대 약 500대 수준으로 파악된다.
마이크론은 지난달에도 약 50대 가량의 한미반도체 TC본더를 도입했다. 마이크론에 납품되는 단가는 스펙이 달라 차이가 있지만, 이번 공급가 기준으로 단순 산술하면 총 1조5000억원 가량의 규모가 된다. 마이크론과의 '신(新)밀월' 관계를 최대한 활용해 세계 1위 TC본더 제조사로서 입지를 굳히겠다는 게 한미반도체의 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