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칼럼] 한미반도체發 '슈퍼을 원기옥'
반도체 섹터를 출입하는 산업 기자들 사이에 한미반도체의 보도자료는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장비 출하 소식을 담은 기사에 첨부되는 사진 때문인데요, 보통 이런 경우 장비를 포커싱하거나 종종 장비와 함께 개발팀 엔지니어들이 도열한 사진이 첨부됩니다. 최근 유리기판 관련 전략장비 TGV를 출고한 필옵틱스가 이런 케이스입니다.
하지만 한미반도체의 사진은 다릅니다. 장비는 배경이고, 사람이 전면에 나섭니다. 한미반도체의 오너 곽동신 회장입니다. HBM 시장이 본격 개화되기 전 2022년 경에는 엔지니어가 제어를 하는 사진이 종종 실렸지만, 고객사 양산 출고가 탄력 받는 2023년 이후부터는 곽 회장이 사진의 전면에 나서는 경향성이 짙어졌습니다. 장비 가운데 서서 팔짱을 끼는 식으로 말이죠. 이를 두고 출입 기자들끼리 고개를 갸웃한 기억이 있습니다. "(멋있긴 한데...)이게 장비 홍보야? 오너 홍보야?" '짐이 곧 국가'라는 말을 남긴 태양왕 루이 14세가 떠오릅니다.
다른 일례도 있습니다. 모 상장사 CFO가 한미반도체의 IR에 참석하고 들려준 후기입니다. "특정 대기업 계열 증권사에 주관한 IR 행사였는데, 한미 측 IR 책임자가 해당 대기업 반도체 고객사를 노골적으로 비판해 주관사에서 곤혹스러워 하더군요. 이른바 '슈퍼을'의 위력을 체감했습니다." 당시 한미반도체의 주가는 TC본더의 대량 출고와 맞물려 고공행진을 거듭하던 때였습니다. 너희 들도 우리 장비를 쓰게 될 거야, 라는 엄포로 들렸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통상 IR, PR은 오너의 직접적 하명을 받는 구조라 오너 성향을 그대로 대변합니다. 곽 회장은 시장에서 소문난 '강골'입니다. 선대부터 다져온 시장 지배력과 업력, 두터운 특허 레퍼런스 등이 만들어 낸 프라이드가 깔려 있죠. 이 때문에 IR, PR 조직 성향 역시 공격 성향이 강하다는 평가입니다. 거품주라고 꼬집은 유튜버와 불리한(혹은 부정확한) 리포트를 쓴 애널리스트를 법적조치한 것 역시 이 성향을 방증하는 사례죠. 이 핵심에는 기업가치(주가)가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최근 5세대 HBM인 HBM3E(12단) TC본더 시장을 두고, 한미반도체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형국입니다. IR, PR 파트의 손도 재차 바빠졌습니다. 보도자료, 공시를 연일 내놓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독점구조를 구축해온 TC본더 시장에서 경쟁사(한화세미텍)가 등장한 뒤 주가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죠.
지난해 6월 TC본더 타이거(DUAL TC BONDER TIGER) 개발로 역대 최고치인 시총 16조를 돌파한 한미반도체는 조정기를 거쳐 올 1월 말 재차 급등, 12조3000억원 수준을 찍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쟁사 퀄테스트 소식 등이 전해지면서 지속적으로 우하향해 1일 6조7000억원 수준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10개월 만에 10조 가까이 증발한 셈이죠. 내부 사정에 밝은 관계자에 따르면 "VIP가 매우 진노한 상황"입니다.
3월 들어 한미반도체의 대응 감정선은 음악으로 따지면 '크레센도(점점 강하게)'입니다. 처음에는 주가 방어를 위해 곽 회장이 2만2258주 가량을 장내매입하더니 한화세미텍 210억원 수주 공시가 나온 이후에는 "(한화세미텍은) 결국에는 유야무야, 흐지부지하게 소량의 수주만 받아가는 형국이 될 것"이라는 곽 회장 멘트를 담아 자료를 배포했죠. 독설에 가깝습니다. 31일에는 공매도 재개를 앞두고, 이례적인 실적전망 공시를 내며 다시 시장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해외 고객사 비중 상승으로 49% 가량의 영업이익률(686억원)을 거뒀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주가는 속절없이 떨어졌죠.
감정선의 클라이맥스는 지난달 31일 일부 매체에서 나온 보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간 총구의 가늠쇠가 경쟁사에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에는 고객사(SK하이닉스)를 직접 향했습니다. 해당 보도에 따르면 한미반도체는 TC본더의 가격을 4월부터 25% 인상한다고 고객사에 '전달'했다고 합니다. SK하이닉스 양산 라인에 한미반도체 TC본더 100기가 넘게 돌고 있는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초강수인 셈이죠. 다만, 이 보도의 팩트 여부에 대해 한미반도체 측은 "공급가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 말할 수 없다"며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도가 맞다면 경쟁사 물량을 도입하고 있는 고객사와 거래 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진배없습니다. 한미반도체는 한화세미텍이 '2모듈+4본딩헤드' 기술을 탈취했다며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한 상황입니다. 차후 특허문제로 한화세미텍이 아웃되더라도 후회하지 말라는 엄포로도 들립니다. 이를 두고 한 투자자는 "한국의 ASML이 탄생했다"고 놀라워 했습니다. 반도체 '슈퍼을'의 상징이죠. 지난달 31일 전망 공시(1분기 해외고객사 비중 90%)와 연동해 보면, 마이크론이 뒷배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SK하이닉스 물량이 빠지더라도 충분히 상쇄가 가능하다는 자신감이죠.
한미반도체가 응축한 분노의 '원기옥'이 상대방을 쓰러뜨릴 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어깃장'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무리한 감정적 대응이라는 얘기죠. 싫든 좋든 SK하이닉스는 엄연한 글로벌 1위 HBM 메이커입니다. 올해 약 80기에서 100기 수준의 TC본더를 도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6세대 HBM4 양산 샘플도 이미 엔드유저향 출고가 됐습니다. 초강수가 먹힐지 자충수가 될지 기로에 서 있는 형국입니다. 한미반도체가 지키고 싶은 것은 뭘까요? 기존 독점적 공급망일까요? 주가일까요?
조영갑 인사이트녹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