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아의 유럽 이야기] EU 의약품 부족 사태, 도대체 무슨 일이?

- 의약품 공급 부족 원인 다양 - 약사법, 대체조제 반대하는 의사단체와 조율이 관건

2023-01-17     박진아 유럽 주재기자

지난 12월 초, 남편은 외출에서 돌아온 후 이튿날부터 편도선통, 미열, 얕은 기침을 호소했다. 나는 급히 평소 기침약으로 쓰던 질로마트와 해열제인 파라세타몰을 사러 동네 약국으로 달려갔으나 약사는 이 두 약품이 떨어졌다며 아이슬란드 이끼를 원료로 자체 조제한 천연 진해제 시럽을 권했다. 약이 급히 필요했던 나는 약사가 권유한 약을 샀고, 다행히도 남편은 약을 복용한 후 일주일 후 회복했다.

며칠 전 잦은 마른 기침이 멈추질 않아 가정의를 방문했다. 겨울철인 만큼 전에 없이 많아진 대기 환자들을 일일이 진료하느라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내 가정의는 쓰고 있는 흰 FPP 마스크 뒤로 이렇게 불평했다. "약국에 약이 떨어져서 처방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이제 유럽이 제3세계로 전락하고 있어요."

유럽의 의약품 재고 부족 사건은 나한테만 일어난 한 편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예년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온화한 겨울 날씨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겨울 들어  유럽에서는 일반 감기, 독감, 영아 RSV(Respiratory syncytial virus), 패혈성 인두염, 심지어 성홍열 감염 사례가 급증했다.

사태가 최고조에 달한 때는 2022년 12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대륙권 유럽의 주요국들과 영국, 대서양 건너편 북미 일부 주에서 보건의료진들은 이미 늦가을철부터 겨울철 의약품 공급 부족 사태 가능성을 경고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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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들도 주요 의약품들의 재고량이 ‘우려에 가까운 수준’으로 부족하다고 보도했다.

아동 호흡기 질환이 유독 폭증한 영국에서는 의사들이 처방한 약품을 구하지 못해 어린이 9명이 숨졌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한 항생제는 말할 것도 없고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던 기초 해열제마저도 동이 나서 약국 찾아 삼만리행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특히 영국에서는 2019년 브렉시트 이후부터 우울증, ADHD, 자폐증 등 정신 질환이나 당뇨 및 암 관리를 위해 지속적으로 약품 처방전을 받아야 하는 만성질환자들을 위한 약품 부족 현상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됐다.

현재 유럽의 병원과 동네 약국들이 공급 부족을 겪고 있는 의약품은 대체로 기초 해열제, 기침약, 진통제 같은 기초 가정상비약과 의사 처방전이 필요한 항생제류다.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기까지 유럽연합은 지난 7~8년 전부터 이같은 사태가 심화될 것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대비하지 않았다고 유럽연합 제약그룹(Pharmaceutical Group of the European Union , 줄여서PGEU)의 비판을 인용해 AFP 통신은 보도했다.

오스트리아

오늘날 전 세계 의약품 제조에 필요한 기초 원료들의 80%와 완제품은 중국과 인도에서 공급된다. 일부 제약기업들이 수익성 감소로 임금이 저렴한 중국이나 인도로 제조공장 이전이나 폐업을 하면 유럽으로 역수입 시 물류와 운반 차질도 의약품 공급 위기를 일으킨다. 

EU 일부 국가 정부들은 유럽의 의약품 공급 부족 사태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던 듯하다. 

예컨대, 프랑스와 독일을 포함한 몇몇 국가들은 2017년부터 의사 처방전 대신 성분이 동일한 복제약품 판매를 허용하고 있다. 또, 프랑스 정부는 핵심 의약품일수록 중국과 인도 생산공장의 유럽 복귀를 제도적으로 지원하자고 촉구한다.

최근 기초 상비약품의 시스템적 차원의 공급 부족에 대한 대책으로써, 약국 약사의 역할을 현재 보다 확대하는 방안이 나라 별로 논의되고 있다. 약국의 약사가 의사가 처방한 특정 완제품 약품 만을 판매하는 임무에서 벗어나 유사 약품을 활용, 유효성분 조제를 허용 및 장려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의약품 수요⬆︎ 공급⬇︎ 트렌드가 당분간 계속될 전망 속에서 환자를 보호하고 효율적인 보건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러나 다급한 유럽 각국 정부들의 마음과는 달리 유럽의 의사들은 대체로 약사의 유효성분 조제를 탐탁해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서도 논란이 됐던 대체조제(=동일 성분 조제) 법적 찬반 논쟁과 유사하다 하겠다.

또, 약사의 유효성분 조제 역할 확대제 또는 대체조제 안은 현재보다 더 많은 약사 인력을 고용해야 한다는 점과 약사가 조제한 약국제제(藥局製劑)는 의약품 회사 제품 보다 가격이 비싸다는 점도 지적돼 그에 대한 제도적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미봉책으로나마 최근  한 의료계 연합은 건강한 이웃이 의약품을 당장 필요로 하는 아픈 이웃과 나누는 운동을 하자는 제안을 하는가 하면, 유효기간이 지나 폐기 처분을 앞둔 약품을 모아 필요한 환자들에게 판매하는 의약품 벼룩시장 제도를 실시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으나 제약회의소의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결국 소비자와 환자가 더 비싸고 귀해진 의약품 가격을 부담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그렇지 않아도 1년 전보다 4~5배 껑충 뛴 가스・전기료, 식료품 가격 인상, 공공요금 인상과 징수 강화로 잠 못 이루는 유럽인들 사이에서 수면제 매출도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왜일까?

*유럽의 의약품 부족 원인은 의약품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나 근원적으로 글로벌 공급 체제 차질이 원인이다.
- 의약품 제조업계의 생산력 감소(해외 외주 제조)
- 의약품의 물류・운반 차질(지정학적 상황)
- 구매 가격 인상(원자재 공급망 차질)

박진아 | 오스트리아 비엔나 거주. 녹색경제신문 유럽주재기자. 월간미술 비엔나 통신원. 미술평론가・디자인칼럼니스트. 경제와 테크 분야 최신 소식과 유럽 동향과 문화를 시사와 인문학적 관점을 엮어 관조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