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왕 미스터리' 이철호 이야기, 전쟁 고아 난민에서 노르웨이 국민훈장 성공기 감동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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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왕 미스터리' 이철호 이야기, 전쟁 고아 난민에서 노르웨이 국민훈장 성공기 감동인 이유
  • 박근우 기자
  • 승인 2019.03.1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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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언빌리버블 스토리'...한국전쟁 중 고아로 노르웨이 첫 한국인 이민자 생활

컵라면으로 노르웨이 국민을 사로잡은 한국인 이철호 씨의 '라면왕' 스토리가 뭉클한 감동을 주고 있다.

17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언빌리버들 스토리' 코너에서는 ‘미스터리(Mr.Lee)’를 소개했는데 '라면왕'이라 불리는 이철호 씨 이야기였다.

노르웨이에서는 “미스터 리 주세요”는 “라면 주세요”와 동의어로 쓰인다. '미스터리'는 이철호 씨가 만든 라면 브랜드다.

이철호 씨는 고아 출신 '한국인 난민 1호'이자 노르웨이에 홀로 첫 정착한 한국인이기도 했다.

이철호 씨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전쟁, 만리타향에서의 굶주림과 소외감, 첫 눈에 반해 결혼한 독일인 부인과의 사별, 그리고 온갖 역경을 헤치고 노르웨이 라면왕으로 우뚝 서기까지. 

미군부대 구두닦이 시절 폭격으로 죽음의 문턱...노르웨이 의료진 도움에 구사일생

1937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이씨는 전쟁통에 가족들과 헤어져 미군부대를 따라서 구두닦이를 하며 살았다. 그런데 속초에서 폭격을 맞아 온몸에 파편이 박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의학적 사망 판단을 받고 시체실에서 하루를 보낸 것.

이철호 씨

가까스로 눈을 떠 보니 온몸의 살이 썩어 구더기가 꾸물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즈음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노르웨이 의사인 파우스 박사를 만났다. 파우스 박사는 한국의 어린 학생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고, 어떻게든 살려 내려 노력했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4월, 17세의 나이에 당시 의학 선진국인 노르웨이 땅을 밟았다. 

노르웨이에서 40여 차례 수술을 거치면서 목발 없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하지만 평생 오른쪽 다리를 절룩거리는 장애인이었다. 

하지만 피붙이 하나 없고 노르웨이 말을 못했던 어린 이방인이 노르웨이에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텔 벨 보이를 시작으로 서류 심부름, 동물병원 잡역부, 화장실 청소부를 전전하며 끼니를 때웠다. 한 달 겨우 5000원을 벌며 생계를 버텼다.

“신체적 장애가 주는 불편함보다 더 힘들었던 건 배고픔”...이국 땅에서 이방인 생활

이철호 씨는 과거 인터뷰에서 “신체적 장애가 주는 불편함보다 더 힘들었던 건 배고픔”이었다며 "주식이 빵죽이었어요. 빵 가게에서 ‘새한테 준다’며 빵 부스러기나 유통기간이 지난 빵을 얻어 와 모두 잠든 밤에 몰래 부엌에 들어가 찬물에 불려 먹었죠. 빵죽을 좋아합니다. 라면도 푹 퍼진 라면이 좋아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니까”라고 회상했다.

이철호 씨는 요리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접시닦이를 시작했다. 남들 보다 2~3배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씨는 한 호텔 주방장 눈에 띄어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프랑스에 요리유학까지 다녀오게 됐다.

이를 악물고 공부한 이 씨는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요리의 선진국인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 세계적인 요리사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됐다. 

1969년부터 1987년까지는 묄하우젠(Møllhausen)에서 중간관리직으로 일했다.

퇴직 이후 1989년, 50세 즈음 라면사업에 대해 구상했다. 인삼차 사업에 실패해 고배를 마신 후였다.

이철호씨가 라면을 알게 된 것은 1971년의 일이다. 당시 스웨덴 정부는 한국 출장을 요청했다.

이 때 처음으로 라면을 먹어보았는데 정말 맛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방부제 등 성분검사를 통과하고 통관 절차를 거치는 데 3년 이상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또, 노르웨이인 입맛에 한국 라면이 맞지 않았다. 너무 매웠던 것이다.

나이 52세에 '미스터 리' 라면 사업 본격화...현지 소소 등 노르웨이 입맛에 맞춰

그래서 그는 노르웨이인들이 좋아하는 소스를 갖고 한국의 유명 라면회사 연구소에 찾아갔다. 연구진과 함께 노르웨이인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덜 맵고 더 기름진 소스를 개발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미스터 리(Mr.Lee)' 라면이 탄생했다. 그의 나이 52세때였다. 라면의 생산은 한국 농심사, 판매는 노르웨이의 식품회사 ‘토로’(TORO)에서 했다.

이철호 씨 얼굴을 닮은 디자인과 한국어로 쓰인 글자가 눈에 띈다.

한 식품기업에서 3년만에 그 맛을 인정하고 대규모 주문을 넣으면서 라면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철호 씨 덕분에 노르웨이에서는 라면의 원조가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알려져 있어 일본 라면이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됐다.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전 노르웨이의 ‘라면왕’으로 등극하는데 성공했다. '미스터 리(Mr.lee)' 라면은 노르웨이 시장에서 한 때 95%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미스터 리' 브랜드에 한글 넣어..."한국에 독자적인 언어가 있다는 것 알리고 싶어"

20년 이상 라면 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미스터 리’가 ‘라면’을 뜻하는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또 라면 표지에 '소고기맛' '닭고기맛' ‘매운맛’ '불고기맛' 등 한글을 적어놓아 한국에 호기심을 갖게 했다. 특히 라면의 겉봉에는 이철호 씨의 웃는 얼굴 모습의 디자인이 꽉 차 있다.

이철호 씨는 한 매체에서 “라면 봉지에 한글을 넣지 않으면 안 팔겠다고 했어요. 노르웨이인들에게 한국에도 독자적인 문자가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고, 한국 사람이 만든 거라는 걸 주지시키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TV 광고에는 이씨가 직접 나와서 한국식 명언을 말하는 광고를 내보냈다.

1989년 노르웨이 식품회사 리버앤소인(Rieber & Søn)에 브랜드를 매각하고 상품 개발에 전념했다. 리버앤소인은 2012년 노르웨이 최대의 식품업체인 오클라(Orkla) 그룹에 편입됐기 때문에 '미스터리' 브랜드도 오클라그룹 소유다.

다만 '미스터 리' 라면의 자재는 농심에서 공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르웨이 국민훈장 등 수상...교과서, 인명백과사전 등에도 실려 '부와 명예 얻어'

이철호 씨를 성공으로 이끈 라면사업인 ‘미스터리’ 라면은 다른 나라 라면보다 3~4배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잘 팔린다. 지금도 노르웨이 라면시장의 시장점유율 50~60%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모든 학교에는 자판기에 ‘미스터리’ 라면이 비치돼 있다.

'미스터리'는 노르웨이에서 한 해 2,500만 봉지 가량 팔린다. 500만 노르웨이인이 1년에 1인당 5봉지 씩 끓여 먹은 셈이다. 

이철호 씨는 노르웨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노르웨이 인명백과사전에도 등록돼 있다. 이철호 씨가 개최한 라면 시식행사를 보기 위해 도시의 초등학생 절반이 결석을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이철호 씨는 유럽 요리사협회 선정 ‘최고 요리사’가 되어 이민자 최초로 2005년 노르웨이 국민훈장을 수상했다. 또 '위대한 노르웨이인 훈장' 및 기사작위까지 받았다. 부와 명예를 거머쥐 유명인이 된 셈이다.

지난 2000년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 때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미스터 리’ 조국의 대통령으로 소개된 것도 이철호 씨의 명성을 알 수 있는 사례다.

이철호 씨에 대한 이야기는 노르웨이 사람들에 의해서도 직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지난 2015년 11월 JTBC '비정상회담'에서 노르웨이 대표 니콜라이는 자국에서 성공한 한국인 ‘이철호’를 언급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이철호씨는 연예인 보다 유명하다는 것.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컵라면 먹는 노르웨이 선수...국민식품 '미스터리' 영향 한 단면

특히 지난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에서는 컵라면 먹는 노르웨이 선수가 관심을 모았다. 크로스컨트리 월드컵에서 2위로 골인한 손드레 튀볼 포슬리였다. 그는 물부은 라면을 곁에 두고 인터뷰에 응했다. 포슬리는 특히 질문이 다른 선수를 향할 때마다 ‘진라면 매운맛’을 호호 불며 연신 들이켰다. 라면이 노르웨이 선수들에게도 국민 식품이라는 것을 알려준 대목이다.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컵라면을 먹고있는 노르웨이 선수.

이철호 씨가 노르웨이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건 라면왕으로 성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업가로서 철학, 기업가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환원이 대표적이다. 

"번 돈은 사회에 환원해야...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인생"

이철호 씨는 “사회봉사를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즐겁게 일하다 보면 돈은 저절로 벌게 됩니다. 번 돈은 사회에 환원해야 합니다. 노르웨이에서 번 돈을 다시 노르웨이에 돌려주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동업자에게도 ‘한국에서 번 돈은 한국을 위해 다 쓸 거다. 동의하면 함께 일하자’고 했습니다. 빈손으로 와서 다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인생 아닙니까”라고 말해왔다.

이 씨의 한국 사랑은 남다르다. 독일인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둔 세 딸이 모두 결혼해 손주가 셋이 생겼는데 사위와 손주의 성이 모두 이 씨다. 사윗감들에게 “성을 바꾸지 않으면 결혼 승낙을 하지 않겠다”며 엄포를 놨다 한다. 

이철호 씨는 2017년, 향년 81세에 하늘나라로 떠나면서도 사회 환원을 실천했다. 젊어서는 살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했고 성공한 후에는 한국인으로 자부심으로 사회 환원에 애썼다. 노르웨이 참전 의료진에게 매년 감사의 파티를 열어준 것도 그 때문이다. 

근현대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태어나 이국 땅에서 홀로 세상을 일군 이씨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이유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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