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에서 배우는 창조경영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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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에서 배우는 창조경영 리더십
  • 편집부
  • 승인 2013.04.1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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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근 교수
한국상장회사협의회가 최근 개최한 조찬강연회에서 김상근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의 ‘메디치 가문에서 배우는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커 ‘녹색경제’가 이를 녹취ㆍ정리했다.

메디치 가문의 업적과 첫 출발

최근 메디치 가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중국에서도 서양에 대하여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는데 거시적으로는 기독교 문명이고, 미시적으로는 바로 오늘 설명드릴 메디치 가문에 대한 것이다. 이는 메디치 가문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어서 세상을 바꾸어 나갔는지에 대한 것을 찾아 그 교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전부터 메디치 가문에 대한 관심은 있어 왔다. 메디치 가문은 매우 독특한 삶의 궤적을 이뤄왔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 그 이야기를 네 가지를 통해 말씀드리려 한다.

메디치 가문은 세계 최고의 부자이었고, 통치자 가문이었다.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태동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메디치 가문 때문이다. 즉,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학자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놀라운 문화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메디치 가문에서는 레오 10세(1475~1521)와 클레멘트 7세(1478~1534)라는 교황을 배출했다. 그 당시에는 로마 인근의 귀족 가문에서 교황을 배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 명의 프랑스 왕비가 메디치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적국인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는 것은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이 이룩한 업적 중에서 몇 가지만 살펴보면, 첫째, 오페라의 탄생이다. 메디치 가문 궁정에서 처음으로 오페라가 상연되면서 오페라 장르가 만들어진 것이다. 둘째,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하여 식사를 하는 식사 예절의 전파다. 셋째, 여성용 바지의 등장이다. 왕실의 귀족들은 여성이라 하더라도 말을 타게 된다. 치마를 입고 말을 옆으로 앉아 타게 되면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여성용 바지를 만들게 된 것인데 그 시초가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넷째, 하이힐 패션입니다.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프랑스 왕비 중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키가 작아 키를 높이기 위해 하이힐을 만들었다고 한다.

메디치 가문에서 후원을 받았던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 ‘미켈란 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마키아 벨리’, ‘아메리고 베스푸치’등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천체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한 망원경의 제작비를 메디치 가문에서 지원하였다. ‘마키아 벨리’가 집필한 「군주론」에서 ‘군주’는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아메리카’라는 대륙의 이름을 명명한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탐험가가 아닌 메디치 은행의 직원이었다.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남미에 투자를 결정하기 위해 현장 조사를 위해 파견한 직원이 바로 ‘아메리고 베스푸치’였고 이 이름을 인용하여 지금의 남미대륙을 ‘아메리카’로 명명하게 된 것이다. 즉 예술, 과학, 투자 등 메디치 가문이 여러 분야에서 후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는 조반니 메디치(1360~1429)이다. 그 뒤를 이어 유명한 코시모 데 미디치(1389~1464)와 피에로 데 메디치(1416~1469),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가 계보를 이어 간다.

메디치 가문은 시골 농장주에서 첫 출발을 한다. 당시 피렌체의 금화 플로린이 유럽의 기축통화로 사용되고 있어 메디치 가문은 어떤 식으로든 은행업에 관여해야 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하여 메디치 가문은 모든 재산을 팔고 피렌체로 이주하게 된다. 가문의 설립자인 ‘조반니 메디치’는 당시 근대적 은행이 태동하던 시기여서 로마의 메디치 은행을 피렌체로 옮겼고, 은행사업의 성공비결은 예금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신용’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당시 인구가 급증하던 시기였으므로 모직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게 된다. 이 은행업과 모직 산업이 메디치 가문이 시작한 첫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사업으로 큰 돈을 벌게 된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이 돈으로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서 세상을 바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된 것일까요.

이 손가락을 보라

성 세례 요한. 1513~1516년 제작(로마) 유채, 69×57㎝. 파리, 루브르 박물관. 레오나르도 다 빈치 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성 세례 요한’이라는 생애 마지막 작품에서 검지손가락을 위로 치켜 올리고 있는 세례 요한을 그렸다. 이는 메디치 가문의 교황 레오 10세의 부탁으로 그리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는 ‘발다사레 코사’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발다사레 코사’는 나폴리 출신의 해적이다. 명문인 볼로냐 대학에서 가짜 법학박사 학위를 매입하고, 로마에서 추기경 자리를 또 매입하였다. 은행거래를 시작하려 했지만 신용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메디치 은행을 찾게 된다. 이후 1410년에 ‘발다사레 코사’는 교황 요한 23세로 취임하게 된다.

당시 유럽사회는 가톨릭 교회의 대분열 시기(1378~1417)로 3명의 교황이 활동하던 시절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독일 콘스탄체에서 교회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또 다른 교황이 취임하게 된다. 이 교황이 ‘마르틴 5세’다. ‘마르틴 5세’는 교황에 취임하자 나머지 3명의 교황을 퇴위시켰는데 이 중 메디치 가문과 거래하던 요한 23세를 투옥시키고 당시 3만5천 플로린이라는 막대한 벌금형을 선고한다.

당시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데 메디치’도 요한 23세를 수행하여 따라 갔다가 교황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잡혀간 곳은 하이델베르크 성이다. 잡혀있는 교황을 ‘코시모 데 메디치’가 보석금을 주고 데려와서 피렌체에서 망명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또한 요한 23세가 죽자 당대 최고의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교황 영묘를 제작하여 요한 세례당에 안치하게 된다.

교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메디치 가문에서는 우리 가문과 거래하였던 사람이므로 당연히 교황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임종 직전의 요한 23세는 메디치 가문에게 자신이 교황이었을 때 보여주었던 그 신의를 자신이 어려웠을 때에도 져버리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감동하고 자신의 마지막 재산인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을 기증했다고 한다.

지금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박물관에 그 손가락이 기증되어서 전시되어 있다. 메디치 가문이 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있는 성 세례 요한을 의뢰한 이유가 바로 바로 한번 맺은 신의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감동을 주고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면돌파의 모범을 보여라

파치가의 음모(1478년) 사건이 있다. 나폴리 국왕 페란테가 사주하여 메디치 가문의 ‘로렌조 데 메디치’를 암살하려는 사건이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부활절 미사에서 거행되었는데, 다행이 로렌초는 목숨을 구하고 대신 동생 줄리아노가 현장에서 즉사한 사건이다.

이후에도 나폴리 국왕 페란테는 나폴리-교황군의 연합군을 출정시켜 피렌체를 포위(1479년)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피렌체 시민들이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지도자 한 사람으로 인해 위험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위기의 순간에 메디치 가문은 결정을 하게 된다. 제 살길을 위해 도망간 것이 아닌 우리를 위험에 빠뜨린 적의 손에 자신들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피렌체의 많은 사람들에게 재앙이 닥치기 전에 그 최악의 순간을 지도자인 자기가 맞이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를 타고 나폴리로 홀홀단신 진입하여 적군의 국왕 페란테와 담판을 지어 그를 설득하여 평화협정을 이끌어 내게 된다. 이것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즉 위기가 찾아왔을 때 위기의 중앙에 서서 정면으로 돌파하라는 것이다.

인내하고 때를 기다려라!

카테리나 데 메디치(1519~1589)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인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혜를 언제나 기억했던 진정한 메디치 가문의 딸. 남편의 사망 이후 단호한 행동으로 왕실과 프랑스의 실권을 장악함. 마키아벨리의 참된 제자. 16세기 프랑스의 “검은 왕비”로 불림. 아들 3명을 차례로 프랑스의 왕으로 등극시킴. 영국, 스페인, 독일,오스트리아의 왕실과 사돈
진정한 메디치 가문의 딸인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메디치 가문의 두 번째 교황 클레멘트 7세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 왕자 앙리 2세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결혼하자마자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서거하고,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왕비라는 칭호 대신 ‘그 이탈리아 여자’로 불리게 된다.

이때부터 카테리나의 비극적인 결혼생활이 시작된다. 카테리나와 결혼한 왕세자 앙리 2세는 미모의 애첩과 바람이 나서 생활하고, 왕실에서 하녀들까지도 카테리나를 무시하게 된다.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버린 카테리나는 혼자 설움을 삼키며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을 읽게 된다.

또한 2세 출산을 위해 프랑스 최고의 점성술사에게 의지하게 된다. 주변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지만 앙리 2세의 아버지 즉, 시아버지는 카테리나를 총애한다. 시아버지의 총애도 얻고 2세 출산에도 성공하게 된다. 카테리나는 왕실에서 라틴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었다. 라틴어를 필요로 하는 외교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왕이 그녀를 총애했다.

앙리 2세가 꼼트(comte) 장군과의 마상 창 시합에서 낙마하여 사망한 이후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왕비가 되어 왕실과 프랑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앙리 2세를 죽인 꼼트 장군을 그 자리에서 처형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관용을 베풀어 살려주는 인내를 발휘하였다. 그 이후 왕비는 16세기 프랑스의 ‘검은 왕비’로 불리게 되었으며, 아들 3명을 차례로 프랑스의 왕으로 등극시키게 된다. 또한 딸들을 영국,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왕실에 시집을 보내 이들과 사돈을 맺어 메디치 가문이 유럽의 여러 왕실을 거느린 위대한 가문이 된다.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져라

유럽 최대의 가문으로 융성하던 메디치 가문도 어느 순간부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는 암살의 위협을 느껴 팔라초 베키오와 피티 궁전을 연결하는 비밀 통로를 건축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바사리 통로(Vasari Corridor)’다. 이 통로는 피렌체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메디치 가문의 신속한 도피를 위한 것이었다. 코시모 1세는 비밀통로가 연결된 성당내 뒤쪽에서 미사를 보게 된다. 군중들과 마주치기를 꺼려한 것이다.

이중 코시모 3세는 병을 얻게 되어 운동을 통해 체중을 조절하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된다. 시민들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바사리 통로’를 통해 걷기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이 가문의 몰락을 재촉했다.

 
반면, 16세기~17세기의 코시모라 불렸으며, 이탈리아와 피렌체 시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국부 코시모가 있다. 국부 코시모의 좌우명은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져라”다. 대중의 시선을 피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라는 말이다.

‘동방박사들의 행진’이라는 그림에서는 당나귀를 타고 가는 코시모가 나온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말을 타고 가는데도 코시모는 당나귀를 타고 간다. 그가 말을 살 돈이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다. 자신을 낮추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당나귀를 타고 가는 코시모의 모습이 바로 여러분들의 모습이고, 지도자의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메디치 가문을 상징했던 말을 기억하며, 여러분들이 바로 한국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메디치 가문이 되기를 바란다.

“손가락을 기억하라!”
“한번 맺은 인연은 버리지 말라!”
“정면돌파의 모범을 보여라!”
“카테리나처럼 인내하라! 멀리 보라!”
“당나귀를 타고 가던 코시모를 기억하라!”

 

편집부  gnomic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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