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의 마샬플랜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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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의 마샬플랜을 만들자”
  • 편집부
  • 승인 2012.06.05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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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병 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장

2012년은 환경운동의 입장에서 각별한 해다. 올해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세상에 나온 지 반세기,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발간된 지 40년이 된다. 물론 우리나라 환경운동 30주년과 리우+20이 주는 의미도 남다르다. 지난 30년을 되돌아보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환경운동의 이념도 조직도 사람도 모두 달라졌다. 아마 다가올 30년도 그럴 것이다. 모든 사회운동은 시대적 요구와 그것을 운동 속에 담아내고자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화한다.

안병옥 소장
한 시대의 모순과 변화의 흐름을 잘 읽어냈던 운동은 그 변화를 주도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경우는 역사의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현실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환경운동의 미래에 주어질 도전과 과제에 대한 논의는 비단 환경운동 30주년을 맞는 올해만의 관심사는 아닐 것이다. 환경운동의 미래가 과거와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것이 환경운동에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과거의 환경운동은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이루지 못했는가. 녹색주류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에서 환경운동을 재구성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누구도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우리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인간의 공간적인 지각능력과 시야로는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대상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매 순간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는 가변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마다 세계를 보는 눈이 다르고 어제와 오늘의 세계가 같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최근 신자유주의와 반신자유주의, 보수와 진보, 개발주의와 환경주의, 낙관론자와 비관론자의 이항 대립적 구도를 떠나 세계가 새로운 ‘불확실성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주장에는 일정한 공감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확실성의 시대’는 1975년 갈브레이스가 과거의 경제사상에 내재되어 있던 확실성을 갈수록 커지고 있는 불확실성과 대비하는 의미에서 붙인 책의 제목이다. 하지만 갈브레이스가 진단했던 시대는 지금의 불확실성과 비교하면 ‘확실성의 시대’에 가까웠다. 미래는 늘 불확실한 그 무엇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는 의미는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를 가로지르는 변화의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 급진전하는 세계화와 정보기술의 발달로 세계의 변화 속도가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내다보는 미래는 불확실성이 더욱 높을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위기의 시대’라고 할만하다. 위기를 동반하지 않는 불확실성은 내일 발생하게 될 교통사고 건수와 같은 것이어서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최근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불확실성이 회자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예측할 수 없는 위기와 연관되어 있고 특정 집단이나 영역의 울타리를 벗어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물론 역사 속에서 위기가 존재하지 않던 때는 없었다. 지금까지 인류는 위기를 극복하면서 진보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위기와 과거의 위기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위기론은 환경주의자들과 반자본주의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최근에는 의도야 어떻든 세계은행, 펜타곤, 다보스포럼, 매킨지, 도이치뱅크 등이 앞을 다투어 위기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위기론을 ‘겁주기’ 또는 ‘과장’으로 치부해 왔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첨병들이다.

과거의 위기들은 대부분 ‘제도의 위기’였다. 제도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 분배와 재분배의 위기 등 정치제도와 경제시스템의 위기를 말한다. 과거에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값싼 에너지와 자원, 눈부신 기술진보, 풍부한 노동력에 기대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일시적인 후퇴는 있었지만 지난 세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했던 것은 경제의 비약적인 성장이었다. 21세기의 GDP가 고대문명으로부터 19세기 말까지 이룩했던 GDP 총합을 훨씬 초과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지배하는 담론의 무대에서도 분배론자들과 환경주의자들을 압도했던 것은 주류경제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원고갈과 기술혁신 간의 경쟁에서 항상 기술혁신이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성장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장의 한계’가 아니라 ‘한계의 성장’이며, 제도의 위기는 수선을 통해 극복 가능한 일시적인 위기일 뿐이다.

오늘날의 위기도 표면적으로는 제도의 위기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대다수 국가들에서는 대의정치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면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극소수 상위계층과 대다수 중하위층의 사회․경제적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 자유방임형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손질과 강력한 규제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의 부메랑으로 휘청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규정해왔던 제도의 치명적인 결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금융위기로 상징되는 제도의 위기가 과거처럼 더 많은 규제나 더 많은 성장을 통한 분배만으로 쉽게 극복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따져봐야 한다. 구체적인 논증이 필요한 문제지만 제도의 위기 배후에 도사리고 있던 ‘실존의 위기’가 작동하면서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처방을 요구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존의 위기는 ‘존재 기반의 소멸 가능성’을 말한다. 전 세계 인구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자원과 토지의 이용이 자연이 제공하는 기본적인 지원체계의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면 그것은 이미 제도의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에너지위기, 농업위기, 기후변화 등이 내포하고 있는 실존의 위기는 제도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뿌리가 훨씬 깊고 치명적이다. 예컨대 석유는 20세기 경제성장의 견인차였다. 하지만 세계는 이미 석유수급이 불균형을 이루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고, 그것은 다시 세계경제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작년 브렌트유 연평균 유가는 배럴당 111 달러였다.

이는 150여 년 전 미국 펜실베이니아 타이터스빌에서 세계에서 처음으로 현대식 유정(油井)이 굴착된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이다. 석유 정점(peak oil)에 대한 논란은 이제 무의미해졌다. 주류 경제학을 대표하는 국제에너지기구의 수석이코노미스트조차 “석유가 우리를 버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석유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솟는 유가는 세계경제에 타격을 가하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분쟁을 유발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향후 수십 년간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석유문명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지혜롭고 공평하고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식량위기로 인류가 고통을 겪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이 우울한 전망은 비관론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식량의 미래에 대해 낙관론을 펴왔던 기관들이 최근 쏟아내고 있는 경고다. 과거의 식량문제가 분배의 문제에서 비롯된 상대적인 식량위기였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소비량이 생산량을 앞질러 절대적인 식량위기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식량위기의 전조는 식량가격의 상승이다. 지난해 식량가격지수는 연평균 228포인트를 기록해 종전 최고기록인 2008년의 200포인트를 3년 만에 갈아 치웠다. 이 지수는 식량가격이 두 배 이상 상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6~7년에 불과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곡물가격 상승의 배경에는 세계 곡물메이저들의 투기, 중국 등 동아시아 시장에서 치솟고 있는 식량수요, 바이오에너지 생산을 위한 식량 전용, 기후변화에 따른 수확량 감소 등 복합적인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 식량가격의 급등은 정치사회적인 불안정을 부른다. 작년 초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불었던 민주화 바람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기상이변에 따른 밀 생산량 감소와 빵 가격 폭등이었다.

기후변화의 위기는 매우 복잡한 정치경제적 함의를 지닌다. 기후변화 시대에 영원한 승자는 없으며 오직 패자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경제적 이해득실과 국가이기주의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코펜하겐 협정을 통해 합의된 목표는 기후변화의 파국을 막기 위해 지구 기온상승을 산업화 이전에 비해 2℃ 이내로 억제한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10년 이내에 온실가스 배출량이 정점에 도달한 후 줄어들어야 가능한 목표인데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기후변화는 국제분쟁 증가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대규모 인구이동은 자원과 토지 소유권을 두고 이주민과 원주민과 사이에 치열한 경쟁을 유발해 사회적 긴장을 높일 가능성이 높다. 유행성질병의 확산이나 물과 식량 부족은 계층갈등을 증폭시키고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을 심화시킬 것이다. 대규모 사회격변으로 구원과 희망을 갈구하게 되면서 종교사상의 극심한 혼란과 파시즘과 같은 극단적인 권위주의 체제를 초래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 역시 환경주의와는 거리가 먼 미국의 펜타곤이나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내놓은 예측이다.

이와 같은 위기의 징후들이 가시화되는 과정에서 세계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시대를 맞게 될지, 아니면 제레미 리프킨의 주장처럼 인터넷기술과 재생에너지가 합쳐진 ‘3차 산업혁명’의 길로 나가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환경운동이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한층 더 포괄적이고 복잡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일 것이다.

환경의 위기, 환경운동의 위기

한국은 위기가 가장 첨예한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나라이다. 우리는 해방 이후 민족분단, 6.25 전쟁, 군사독재, 정경유착 등으로 많은 고난과 희생을 치러야 했다. 불과 반세기만에 민주주의를 이루고 절대적인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이 흘린 피와 눈물과 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많은 국가들이 선망하는 대한민국의 성공은, 그 이면에 위기의 씨앗이 감춰져 있는 ‘이율배반적인 성공’이었다. 확고한 사회원리로 정착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민주주의, 인권, 언론자유 등의 가치는 최근 그 토대가 매우 허약한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재벌과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중소기업과 영세 상인들은 도산 위협에 시달리고 있으며, 가난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다. 거리는 비정규직으로 넘쳐나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얻지 못해 절망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냉정한 현실이다.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불균등한 기회가 심화되고 있는 사회는 환경운동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 끝없는 경쟁과 가난 속에 내몰려야 사람들은 환경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공공선보다는 나의 권리와 이익을 우선시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울리히 벡이 지적한대로 환경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위험은 우리의 오감으로는 감지할 수 없다. 고급아파트는 판자촌과 대비되면서 부의 격차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반면, 기후변화나 방사능 위험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인식되지도 않는다.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는 나의 존엄성과 신념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지켜야할 가치이지만, 에너지와 먹을거리는 값싸게 얻을 수 있는 한 나의 권리와 자유를 제약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공정한 분배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과 달리, 보다 안전한 세상을 추구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복지시스템이 허약할수록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든다. 최근 국민의식조사에서 다른 사회문제에 견줘 환경문제 해결의 중요성이 뒤로 밀리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나 양극화 심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지금까지 환경운동이 거둔 성적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환경운동이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에 실패했는지를 알려면 운동, 조직, 재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심층적인 분석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은 모든 사회운동의 존재근거랄 수 있는 운동 목표의 달성 여부다. 환경운동이 등장한 이래 한국의 환경은 얼마나 나아졌는가? 냉정하게 평가하면 그다지 좋아진 게 없는 것 같다. 부분적인 진전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대기질과 수질 등 사후관리(end of pipe) 분야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둔 반면, 강과 들, 갯벌생태계 등 자연은 그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었다. 수출경쟁력과 산업계 보호를 명분으로 에너지 낭비를 부추기는 정책과 농업경시정책이 지속되면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바벨탑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연의 파괴는 대부분 국가가 주도하는 대규모 토건사업에 의해 이루어졌다. 건설교통 분야의 투자는 2000년 이후 17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GDP 대비 건설투자율도 20%에 육박하고 있다. OECD 국가들이 대개 7~8%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을 토건국가로 부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07년 9월 대통합민주신당 홍재형 의원은 대한민국을 ‘전 국토에서 굴착기의 굉음이 끊이지 않고 땅값 상승에 대한 즐거운 비명으로 날이 새는 건설공화국’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건설교통부와 산하기관에서 제출 받은 자료를 종합했더니 여의도 면적(840만㎡)의 72배나 되는 6억1184만㎡에서 각종 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더라는 것이다. 당시 개발 사업에 237조 3859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됐고, 시중에 풀린 보상비만 97조3억 원에 달했다. 엄청난 사업비 부담은 정부의 재정압박으로 이어지고 보상비가 투기자금화하면서 부동산 시장이 들썩거렸음은 물론이다. 대운하 건설계획과 4대강 사업은 이명박 정부의 본질을 드러낸 토건사업이었지만, 자연을 한낱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정부의 행태는 이명박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경제부총리가 나서 “230여개의 골프장 건립 신청 건을 4개월 안에 일괄 심사함으로서 조기 허용해 골프장을 500개 가까이로 늘려 경기를 살리겠다.”고 했던 것은 참여정부다.

‘에너지의 97% 이상을 수입’이라는 수치는 한국사회에서 수십 년 동안 그대로 유지된 유일한 통계다.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는 자동차, 반도체, 조선 3대 수출업종에서 벌어들이는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해외에서 에너지를 사오는데 쓴다. 하지만 에너지정책을 산업정책에 종속시켜 저가정책을 지속한 결과, 에너지 소비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증가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에너지 소비증가가 방치되면서 온실가스 배출량 또한 2008년 세계 9위에서 2009년 세계 8위, 2010년 세계 7위로 해마다 한 단계씩 상승해 왔다. 지난 20년간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량은 2배 이상 증가해 증가속도가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빨랐다. 2009년 인구 일인당 배출량은 12.5 톤으로서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2~3배 많은 독일과 일본보다 많다.

농업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재작년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26.7%, 이마저도 쌀을 제외하면 5%에 불과했다. 수출산업을 위해 농업을 희생시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편 결과, 농지전용 등 농업의 생산기반은 지속적으로 위축되고 있다. 낮은 자급률과 편중된 수입구조는 언제든 식량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수준이다. 구제역 파동을 통해 드러났지만 공장식 가축사육의 문제도 선을 넘은지 오래됐다. 지난 20년간 농가당 가축 사육 수는 한우 8배, 돼지는 36배, 닭은 무려 89배나 증가했다. 우리나라의 가축 사육밀도는 일본의 3~4배, 미국의 3~15배에 달한다. 시야를 한반도 전역으로 넓히게 되면 위기감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에너지와 식량부족에 맞서 사투를 벌인지 오래다.

남쪽의 핵발전 확대정책과 북핵문제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핵발전소 21기가 가동 중인 한국은 세계에서 원전 밀집도가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거기에 더해 이명박 정부는 2030년까지 원전 10기를 더 건설해 핵발전 비중을 현 36%에서 59%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앞으로도 원전 54기의 가동을 모두 멈춘다고 가정하더라도, 중국에 이미 건설되었거나 건설 중인 핵발전소 40기까지 합하면 우리는 곧 70여기의 핵발전소로 에워싸이게 된다. 북핵문제 역시 현재진행형의 위기다. 매년 반복되는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맞서 북한은 ‘핵억제력을 바탕으로 한 성전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혀 왔다.

약간은 다른 관점에서 지난 4월 총선에서 녹색당이 얻은 득표율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녹색당은 비례대표 득표율이 0.48%로서 3~5% 득표라는 목표에 크게 미치지 못했으며, 2명의 지역후보 득표율 역시 2~3%에 그쳤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저조한 결과이다. 짧았던 선거 준비기간을 원인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10년 전 녹색평화당이 창당 후 한 달 만에 치른 지방선거에서 1.34%의 광역의회 비례대표 득표율을 남겼기 때문이다. 앞으로 녹색당 내외에서 보다 깊은 분석이 이루어지겠지만, 환경운동의 정치화가 앞으로도 험난할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온 몸을 던져 환경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은 자괴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환경현실로 보나 정치세력화의 측면에서 보나 환경운동이 받아든 성적표가 초라한 수준이라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은 한국의 정치사회적 조건에서 당분간 환경운동에 주어진 숙명일 수도 있고, 뼈아픈 성찰을 통해 환경운동가들이 바로잡아야할 과거의 오류일 수도 있다. 결국 문제는 환경운동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이다.

환경운동의 재구성과 녹색 주류화

환경운동을 재구성하기 위해 가장 먼저 생각해야할 문제는 우리가 환경운동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이다. 우리는 무엇을 환경운동이라 부르고 있는가? 단순해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환경운동이라는 말 이외에 녹색운동과 생태주의 운동 등이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환경이라는 낱말이 인간과는 구분되는 그 ‘무엇’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환경이 인간을 배제하기보다는 포함시킨 개념이라면, 환경문제인 것과 아닌 것의 구별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내고 있는 지구온난화를 환경문제로 본다. 그렇다면 대대적인 환경파괴를 수반하는 빈곤과 전쟁 또한 환경문제로 생각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환경운동이 언젠가부터 확장성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면, 그것이 혹 ‘환경’이라는 낱말의 폐쇄성 때문은 아닌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환경이라는 낱말을 쓰게 되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운동을 스스로 협소화시키게 된다. 녹색연합은 환경운동단체로 분류되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녹색’이 환경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녹색이 환경과 인간의 이분법적 구분을 벗어던진 포괄적인 개념이라는 것은, 녹색당이 소수자 권리, 여성, 평화 등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생태’라는 낱말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환경보다 더 넓고 깊은 함의를 갖고 있다. 서양에서 생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망을 뜻하며, 우리나라 생태주의 운동의 이론도 “밥이 하늘이다”로 시작된다.

용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운동의 범주에 관한 문제다. 환경운동은 은연중에 환경단체들의 운동 또는 다른 사회운동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운동이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건강한 먹을거리를 매개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생활협동조합운동,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노동운동, 유기농을 실천하는 농민운동, 인간과 자연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반전평화운동, 마을공동체를 복원하려는 운동 등은 모두 환경운동의 이념을 실천하는 운동들이다. 요컨대 환경문제가 인간에 의해 초래된 것이고 환경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사회의 모든 영역을 어떻게 생태적으로 재조직할 것인가에 있다면, 환경이라는 낱말을 굳이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몇 년 전 미국에서도 환경운동이 이념, 법과 제도의 변화, 조직 등 모든 측면에서 낡았다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다. ‘환경주의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는 환경주의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환경이라는 말부터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앞으로의 과제는 환경운동이 자연의 파괴와 오염을 막는 운동이라는 협소한 이미지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에 있다. 환경운동은 민주주의, 경제, 노동, 농업, 인권, 평화 등의 가치들과 생태적 가치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이미 2003년 환경운동연합 1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환경운동을 한다고 자처하면서 다른 운동과의 연대에 진정을 힘을 실어보지 못하였다. 또 다른 운동단체들도 환경운동을 특화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녹색운동은 다면적이며 영역 관통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녹색과 성 평등, 녹색과 소비자운동, 녹색과 참여 민주주의운동, 녹색과 인권, 녹색과 평화통일 운동 등의 다면적 접근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환경운동이 영향력을 갖지 못한 이유가운데 하나는 이것이 너무 '녹색'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이시재-녹색주류화를 위해).

또 한 가지 환경운동 앞에 놓인 과제는 ‘낡은 것에 대한 반대’와 ‘새로운 것의 실험’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균형을 어떻게 취할 것인가이다. 언제부터인가 환경운동에는 늘 반대만 일삼는 운동이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실제로 운동이 대규모 개발 사업에 맞서는 항거에 집중된 데다 환경운동가들 스스로 '××× 반대운동‘, ’△△△ 저지운동‘으로 부른 탓이 크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뚜렷한 흐름으로 고착화되면 대안의 중요성을 소홀히 함으로서 운동의 족쇄로 작용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조직과 개인의 공통점은 개별 이슈에 대한 해답보다는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공포보다는 희망을, 부정의보다는 정의와 약자에 대한 사랑을, 체념보다는 용기를 추구함으로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나에겐 꿈이 있다”는 연설로 유명한 마틴 루터 킹이 존경받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운동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먹고 자란다. 노동운동은 해고 없는 삶과 인간다운 노동을, 농민운동은 농사짓는 사람이 나라의 근본이 되는 세상을, 여성운동은 가부장제와 성별분업 및 차별적 성 규범에서 해방된 남녀평등사회라는 꿈을 통해 운동의 정당성을 확인한다. 물론 사회운동을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희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희망을 내걸지 않는 운동은 폭넓은 지지를 받기 어렵지만, 분노하지 않는 운동은 성립조차 어렵다. 비인간적인 노동, 농업경시, 성차별에 대한 분노가 없었더라면 노동, 농민, 여성운동은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환경운동도 마찬가지다. 환경운동에 존재하는 이념의 넓은 스펙트럼을 떠나 분노를 배제한 환경운동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노만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키기에 역부족인 것도 사실이다. 모든 운동에는 이정표와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운동은 자기 완결적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환경운동의 이념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다시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환경운동에 생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대안과 전략이 있는가? 지금으로서는 없다는 것이 솔직한 답변일 것이다. 전통 좌파이론들은 위기에 무관심하거나 ‘자연의 수용능력 한계’를 부정하며, 유럽의 ‘생태적 근대화’ 이론은 기술주의에 경도되어 자본이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욕망의 문제에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헬레나 호지의 라다크 마을 공동체는 ‘오래된 미래’일지언정 대한민국의 미래가 되기는 어렵다. 탈 성장론은 산업문명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생태학에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구체적인 대안에는 취약하다. 설득력 있는 대안이론의 부재 속에서 환경운동의 이념적 좌표를 모색한다는 것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한두 가지 설익은 단상 정도는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출발점은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발전이 지속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어떤 발전인지 제대로 묻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지만, ‘미래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을 말하는 이 개념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발전의 지속을 무한정 허용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 세상에 변화․발전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얼마나 발전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발전하는가이다. 발전은 경제성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무엇이 성장해야 하고 무엇이 억제되어야 하는지 선택이 가능하다면, 성장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성장이 아니라 성장주의가 문제이며, 탈 성장론자들도 재생가능에너지, 유기농업, 숲, 사회적 기업, 도시텃밭의 ‘성장’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선택적 성장’을 누가 어떤 사회적 관계망에서 결정하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은 사회적 가치와 경제 가치를 생태적 가치에 굴복시키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 사회, 생태가 등가의 가치를 지니며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경제는 사회의 일부분일 뿐이며, 인간의 사회적 활동은 생태계의 수용능력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은 환경보호가 경제시스템과 사회적 형평성을 도외시한 채 달성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경제논리의 압도적인 우위를 용인하는 수단일 수 없다.

따라서 경제는 사회에 포섭되고 사회의 작동원리는 생태계의 법칙에 따르는 ‘내포적 지속가능 발전’을 대안으로 검토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속가능 발전 개념은 경제-사회-생태의 병렬이 아니라 경제 < 사회 < 생태의 내포적 관계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가 사회에 포섭된다는 것은 사회가 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칼 폴라니의 문제의식과 닿아있으며, 사회가 생태계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수용능력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충족성(sufficiency), 즉 욕망의 방향전환과 삶의 질 확보가 가능한 사회체제를 말한다.

환경운동의 마샬플랜을 만들자

향후 30년간 환경운동을 규정하는 사회적 조건은 엄청나게 변화할 것이다. 환경운동가들은 싫든 좋든 ‘탈 물질화’와 ‘탈 중심화’에 기초한 사회경제적 전환에 대비해야할지도 모른다. 정보화 사회의 변화 속도는 어지러울 정도다.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패턴이 양에서 질로 급격하게 이동하고 있으며, 개인이 의존할 중심이 해체되고 있다. 정보화의 진전으로 정치적 수단과 동원방식, 그리고 주체까지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지금의 조직 형태가 앞으로도 유효할 것인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규모가 큰 단체들의 경우 집중과 영향력 발휘에 용이한 현재의 단일 거대조직 형태를 유지할 것인지, 작은 조직들이 책임성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하나의 우산 밑에서 수평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조직으로 전환할 것인지 결정해야할 시기가 올 것이다.

녹색의 정치세력화도 지속적으로 토론되어야할 과제다. 근대 환경운동사를 기술한 독일의 역사학자 요아힘 라드카우의 결론처럼 “환경운동이 스스로 권력이 되고자하지 않는 한, 성장주의를 이길 수 있는 기회는 갖지 못할 것이다.” 운동의 재생산 구조를 갖추는 일도 시급히 추진되어야 한다. 운동가들을 양성하는 녹색사관학교를 만들 되, 이곳에서는 자연과학과 공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인문학, 정치경제학, 농사, 에너지제로 건축, 녹색디자인, 옷, 적정기술 등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환경운동의 이념, 전략적 동맹대상, 조직형태, 재생산구조, 운동방식 등을 담은 ‘마샬플랜’은 소수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환경주의와 생태주의에 포괄될 수 있는 모든 개인과 집단이 씨줄 날줄로 서로를 엮어가면서 풀어야할 숙제다. 위기가 본격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낼수록 환경운동에는 새로운 사고와 더 많은 책무가 요구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대전환의 변곡점을 향해 가고 있다면, 전환의 시대를 누구와 손잡고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는 순전히 환경운동 스스로에게 주어진 몫이다.

 

편집부  ggalba@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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