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아의 유럽 이야기] 무도회의 사회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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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아의 유럽 이야기] 무도회의 사회경제학
  • 박진아 유럽 주재기자
  • 승인 2023.02.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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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비엔나 무도회 시즌에 즈음하여
- 과거와 '현대 마케팅'의 만남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지난 3년 동안 취소됐던 비엔나 무도회 시즌이 되돌아왔다.

올해는 1월 17일 빈 필하모니커 무도회를 시작으로 무도회 시즌이 재출발했다.

Photo: Peter Rigaud/Wien Tourismus
비엔나 국립오페라 무도회. Photo: Peter Rigaud/Wien Tourismus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비엔나)에서는 매년 새해 1월 1일 오전, 특별 초대된 정상급 초대 지휘자와 빈 필하모니커 오케스트라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노이야르스트콘체르트(Neujahrskonzert)’ 신년 음악회로 새해를 시작한다. 

빈 필의 주공연장인 빈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의 황금홀에서 연주되는 클래식 음악 레퍼토리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마지막 곡은 언제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An der schönen blauen Donau)‘의 왈츠다.

그렇게 향수 젖은 경쾌한 왈츠로 신년을 시작한 비엔나의 겨울철 문화 달력과 행사 일지에는 또다른 행사 스케줄로 빼곡하게 채워지는데, 그것은 바로 신년 무도회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매해 1~2월에 전국 곳곳에서 무려 450 여 크고 작은 다양한 무도회가 열린다. 브라질에서 매년 2월 카니발 축제가 열린다면, 오스트리아에서는 무도회가 열린다고 하겠다.

사람들은 저마다 속해있는 직업군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특성있는 무도회 행사를 이 나라 사교 써클에 진출(debut) 하고 인맥을 넓혀 나가는 사교 무대로 활용한다.

유럽서 무도회란 본래 귀족들만을 위한 사교 행사였다. 결혼 적령기 선남선녀들이 좋은 가문출신의 미래 배우자를 만나던 중매장 —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처럼— 또는 기혼자들이 몰래몰래 불륜의 상대를 만났던 비밀 데이트 장소 — 예컨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처럼 — 이기도 했다.  

18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요제프 2세 황제는 이 무도회를 모든 대중이 출입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이어서 1815년 빈 국제 평화 회의(나폴레옹 전쟁 후)를 계기로 빈은 겨울철 무도회의 도시로서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작년 11월에는 비엔나 굴뚝청소부 조합이 주최한 라우팡케러발이 미리 열렸고, 새해 들어서는  1월 12일에 과자점을 운영하는 제과업자 조합이 조직한 추커베커발 무도회로 무도회 시즌을 개막했다. 이어서 화훼상 조합이 조직한 블루멘발(1.12), 빈 경제경영대학 학생회가 주최한 WU발(1.14), 화려하고 격식 높기로 유명한 비너 필하모니커발(1.19), 동성애 운동단체가 구성한 빈 레겐보겐발과 의사 조합 무도회인 에르츠테발(1.28)이 차례로 열렸다.

2월 초에는 빈의 카페업주 조합과 경찰 무도회(2.3)가 열렸고, 법조인 조합이 조직하는 유리스텐발과 음력 설을 기념하는 중국신년 무도회(2.18)도 계획돼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무도회 시즌의 하이라이트는 비엔나 국립 오페라하우스(Staatsoper)에서 열리는 비너 오펀발(Wiener Opernball)이다. 

오펀발은 오스트리아 공화국 지정 공식 무도회다. 올해엔 2월 16일 목요일 저녁 8시 15분에 개막해 이튿날 새벽 5시까지 열렸다. 무도회는 다시 한 번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연주에 맞춰 사교계에 첫 진출하는 180쌍의 단체 월츠춤을 끝으로 마감한다.

리햐르트 루그너(Richard Lugner)라는 유명한 사업가 겸 리얼 TV쇼 주인공이 매년 해외서 초대해 온 유명 여성 연애인과 함께 무도회에 등장해 대중지 가십난을 달구는데, 올해에는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미국 여배우 제인 폰다가 특별 초대 손님으로 등장했다.

놀랍게도 나는 빈에서 20년 가까이 생활 동안 아직 무도회에 가봤다는 현지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21세기 오늘날에 와서도 과거 유럽 사회에서 무도회가 수행하던 기능은 남아있다. ‚무도회는 여전히 일부 소수 상류층에서 가문 간 혼인이 내약된 남녀를 사교계에 공식 소개・승인시키는 통과의례’라고 빈에서 태어나 60여 년을 살아온 전직 교사 카타리나 S(사생활 보호 위해 실명 축약) 씨는 말한다.

입장료를 구매하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지만 무도회에 참가 전 준비 과정은 대학입시 준비처럼 만만치 않다. 남녀 모두 철저한 드레스코드를 준수해야 하고, 미리 춤과 예절 수업을 받고 시험에 통과해야 무대장에 오를 수 있다. 입렇게 입장한 사교계 젊은 남녀 커플은 부모나 가족 주선 상견례 후 무도회에 참석해 타 가문 및 사교계 인사들과 안면을 튼다.

현직 정치가, 경제인, 문화계 인사, 예술가, 연예인, 사교계 스타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자리인 만큼 가장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오펀발 무도회는 올해 유난히 보안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도회 바깥에서 환경운동 단체인 시스템 체인지 낫 클라이밋 체인지(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라는 환경운동 단체가 ‚부자들을 잡아먹자(Eat the rich)‘라는 구호를 내걸고 교통이 혼잡한 도심 도로를 막는 시위를 벌였고, 한 좌파단체는 오페라하우스 건물 뒤켠에 자리잡고 ‚부자들을 때려주자(Punch the rich)‘라고 외치며 도보 시위를 벌였다.

이 모든 소란 속에서 대중 여론은 대체로 시큰둥하다. 코로나19를 간신히 뒤로 한 지금, 러-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요금 폭단, 물가 인상, 난민 인구 유입 증가 등으로 짜증이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무도회가 웬 말이냐고 항의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경제적 측면에서 무도회의 순기능도 없진 않다.

춥고 우중충한 1~2월 겨울철, 무도회는 사교계 한량들에게는 지인과 만나 친목을 다지며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우아한 사교 스포츠이자 사업가들에게는 인맥 관리와 정보 교환을 할 수 있는 절호 찬스다.

또, 무도회철은 언론과 일반 대중에게 요즘 사교계 최신 패션과 뷰티 유행을 둘러싼 눈요깃거리를 제공해 주고, 어패럴 업계, 미용실, 피부관리소, 요식업자, 카지노 도박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소비산업 부문 비즈니스계 업계가 그 해의 소비 트렌드와 매출을 점칠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비엔나 제과상 조합이 주관하는 추커베커발 무도회. © Ripix
비엔나 제과상 조합이 주관하는 추커베커발 무도회. © Ripix

오스트리아 비엔나 거주. 녹색경제신문 유럽주재기자. 월간미술 비엔나 통신원. 미술평론가・디자인칼럼니스트. 경제와 테크 분야 최신 소식과 유럽 동향과 문화를 시사와 인문학적 관점을 엮어 관조해 보겠습니다.

박진아 유럽 주재기자  gogreen@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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