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후]금성 라디오 출시 이후 ‘환갑’ 지난 전자산업 ...구인회·이병철 '라이벌 5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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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후]금성 라디오 출시 이후 ‘환갑’ 지난 전자산업 ...구인회·이병철 '라이벌 50년 전쟁'
  • 박근우 기자
  • 승인 2020.11.16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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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마교우' 이병철과 구인회, 전자산업에서 경쟁 '51년 전쟁'
- 기술-브랜드 경쟁의 역사...세계적 기업 삼성과 LG의 오늘을 만든 기폭제
- 삼성 '반도체 신화', 글로벌 톱 전자업체 성장...LG, 생활가전에서 월풀 제치고 선두
- 선대 회장 별세 후 이재용-구광모, 디지털 트랜드포메이션 시대 맞아 경쟁과 협력

지금의 LG전자 전신인 금성사가 국내 최초의 전자제품인 진공관식 라디오 ‘A-501’을 출시한지 61년이 지났다. 대한민국 전자산업이 ‘환갑’을 넘긴 셈이다. 이전까지 일본산 부품을 수입해 조립하던 수준에서 국산 자체 기술로 완제품 라디오를 개발한 것은 이후 국내 전자 산업의 출발점이란 점에서 일대 사건으로 기록될 만 하다. 이 라디오는 현재 서울특별시 및 경기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전자산업은 해방 이후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땅에 ‘한강의 기적’을 일군 일등공신이었다. LG전자는 세계적인 가전업체로 성장했다. LG에 뒤이어 전자 산업에 뛰어든 삼성전자는 반도체, 스마트폰 등을 필두로 글로벌 1위 업체로 발돋움했다.

구인회 창업자로 시작한 LG는 구자경, 구본무 회장을 거쳐 구광모 대표가 ‘4세 경영’에 들어갔다. 국내 재계 1위에 올라선 삼성은 이병철 창업주, 이건희 회장에 이어 이재용 부회장이 진두지휘하고 있다.

◆ 그날

국산 기술로 개발한 금성사 진공관 라디오 ‘A-501’...대한민국 전자산업의 태동

1959년 11월 15일.

금성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를 출시했다.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효시로 불리는 이 라디오 모델 이름은 ‘전기용 5구 라디오 제1호’라는 뜻에서 ‘A-501’로 명명했다. ‘A-501’은 그해 8월경 시제품이 완성돼 상공부 제4133호로 상품 등록을 마쳤다. 너비 40cm, 폭과 높이 각각 17cm의 라디오 안에는 5개의 진공관과 5인치 크기의 스피커를 장착했다. 당시 열악한 전기 상황을 고려해 최소 50볼트의 낮은 전압에서도 작동하도록 설계했다.

이 제품은 진공관, 스피커, 볼륨 조절기 등은 수입 부품이었지만 전원 스위치, 트랜스 등은 국산 부품을 사용한 완제품 라디오라는데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바야흐로 우리 전자 산업이 단순 조립 수준을 넘어선 시발점이기도 하고, 부품 국산화에 시동을 건 것이다.

국내 최초 금성사 라디오 'A-501'
금성라디오 초기 광고

1947년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창업한 구인회 회장의 경영철학은 "남이 미처 안하는 것을 선택하라“는 것과 ”국민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것부터 착수하라"로 모아진다. 우리 국민에게 꼭 필요한 제품 국산화에 사활을 건 것이다.

국내 최초의 전자회사 타이틀을 가진 금성사는 1958년 10월 1일 부산 연지동에 설립됐다. 구인회 회장은 당시 아들 구자경 락희화학 상무 등을 불러모아 결단을 내렸다.​

“우리가 언제까지 미제 PX물건만 사 쓰고 라디오 하나 몬 맹글어 되것나! 누구라도 해야 하는 기 안이가? 우리가 한번 해보는 기라. 몬자 하는 사람이 고생도 되것지만서도 하다보면 나쇼날이다, 도시바다 하는 거 맹키로 안되것나.”

그렇게 금성사 초기부터 국산 라디오 개발 및 생산 준비에 착수했다. 1959년 당시 하동중학교 교사였던 김해수 씨의 주도로 금성사 공채 1기생인 기능공 2명이 일본제 라디오 산요를 모델로 삼아 제품을 설계했다.

라디오 외관 디자인에는 금성 영문이름 'GoldStar(골드스타)'와 왕관을 연상시키는 별 마크를 새겨넣었다. 1959년 첫 해 생산량은 87대. 디자인 색상은 백색, 민트색 등 5가지였다. 제품은 미도파 백화점에서 2만환의 가격에 첫 판매를 시작했다.

금성사 골드스타 로고

미군 PX(매점)를 통해 시판되던 미제 라디오보다는 가격이 저렴하였으나 초기에는 불량률이 높아 시장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전압이 자주 끊기거나 불안정했기 때문. 소비자의 외국산 선호 경향도 현실적 장벽이었다.

그러나 사업 운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 대대적으로 밀수품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면서 판매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판매가 늘면서 품질 또한 지속적으로 개선됐다. 이를 바탕으로 1962년에는 처음으로 미국 아이젠버그에 라디오를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진공관 라디오에 이어 이듬해인 1960년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개발했다. 라디오를 통해 자신감을 갖게 된 금성사는 이어 '국내 최초'가 붙는 전자제품 개발 및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1960년 선풍기, 1961년 자동전화기, 1963년 국산 적산전력량계가 그 제품들이다. 1964년 부산 온천동에 종합생산공장을 건설하고 연지동 시대를 마감한 금성사는 1년 뒤 국산 냉장고 1호를 출시했다.

1961년 국산 자동전화기로 시험통화하고 있는 구인회 LG 창업주
1961년 국산 자동전화기로 시험통화하고 있는 구인회 LG 창업주

금성사는 1966년 8월 국내 최초의 국산 19인치 흑백TV 'VD-191'을 생산했다. 이는 이후 대한전선, 삼성전자 등 후발 전자업체들의 진출에 영향을 줬다. 그해 9월에는 한국케이블공업(주)를 합병하고 1967년 본사를 서울 을지로 한일을지빌딩으로 이전했다. 금성사는 1973년 기업공개 단행 후 1975년에 경북 구미공장, 1976년에 경남 창원공장을 준공했다. 

1959년 당시 총자본금 1000만원, 직원수 313명, 매출액 5000만원이었던 회사는 부산 온천장 공장이 완공된 이후 크게 성장해 1964년에 직원수 2,500명로 불어났고, 1969년에는 5,000명을 넘어섰다. 1982년에는 매출액이 4500억 원을 넘었다. 직원수는 9,610명이었고 수출액은 2억 달러에 달했다.

금성사 국내 최초 브라운관 흑백TV(모델명 VD-101)

◆ 그후

1969년 삼성전자 설립 ‘기술 자존심 경쟁’...사돈관계 LG-삼성 ‘51년 전쟁’ 시작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삼성은 흑백TV의 폭발적 성장에 자극받아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했다. 금성사로서는 10년 만에 강력한 도전자를 만난 것. 이후 양사는 지금까지 51년간 '전쟁' 중이다.

삼성과 LG 두 회사의 창업자는 ‘죽마교우(竹馬交友)’다. 삼성 이병철-LG 구인회 선대회장은 경남 진주의 '지수보통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한 인연이 있는 등 우정이 돈독했다. LG가(家) 3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삼성가 차녀 이숙희 씨가 1957년 결혼해 사돈관계이기도 했다.

삼성과 LG, 전쟁의 서막은 어느 골프장에서 벌어졌다.

이병철 회장 "구회장,  우리도 전자사업을 하려고 하네"

구인회 회장 "지금 뭐라고 하셨소? 나랑 같은 사업을 하겠다고?"

삼성이 전자산업에 뛰어들면서 양사 관계는 냉각됐다. 당시로서는 정부 허가에 의해 업종별로 1개 회사만 존재하던 시기였다. 삼성전자 창립으로 같은 영역에서 경쟁을 금기시했던 암묵적인 룰이 깨진 셈이다. 삼성전자는 당시 수출을 목적으로 정부 허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수출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라서 삼성과 LG는 국내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금성 테크노피아 광고

삼성은 일본 전자업체 산요의 하청업체로 TV 생산을 시작했는데, 한동안 경영난에 시달렸다. 삼성전자는 1972년 독자적인 흑백 TV 개발에 이어 정부가 내수용 흑백TV 생산을 허가하면서 1974년 흑자전환에 성공, 대한전선을 제치고 업계 2위에 오른다. 두 회사의 '가전 전쟁'은 삼성전자가 1975년 '이코노 TV'라는 히트 상품을 내놓으면서 본격화됐다. 삼성전자는 1977년 국내 최초로 컬러 TV(컬러 이코노 TV)를 개발하고 수출에 나섰다.

1980년 8월 국내에서도 컬러 TV 시판이 허용되자 삼성과 LG는 기술 경쟁에 돌입했다. 예나 지금이나 기술전쟁은 스카웃 경쟁으로 이어지는 법. 양사의 인력 빼오기가 극에 달하자 결국 전자업계의 대표들이 모여 '소속회사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퇴직한 자를 1년 이내 다른 전자업체에서 채용할 경우 부당스카웃으로 간주한다'는 협약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기술의 상징 금성’ 광고 캠페인

삼성과 LG의 '기술 전쟁'은 소비자들을 잡기 위한 광고 전쟁으로 이어졌다. LG전자는 1966년 흑백TV ‘샛별 텔레비전’이 인기를 끌자 ‘기술의 상징, 금성’ 광고를 내놨다. 이에 삼성전자는 ‘첨단’ 두 글자를 더해 ‘첨단 기술의 상징’ 카피로 상대를 자극했다. LG CF가 "아무리 돌려도 선명한 화면. 고장을 모르는 긴 수명의 순금튜우너~ "라고 하자 삼성은 이코노TV CF에서 "예열 없는 순간 켬. 절전 20%. 수명연장. 화면안정"이라고 대응했다.

지금도 회자되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기술의 상징 금성’이라는 희대의 히트 카피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LG전자의 당시 자부심과도 같았던 이 광고로 인해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에서 5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986년 LG는 ‘기술이 생활을 편리하게 즐겁게 한다’며 ‘테크노피아’ 광고 시리즈를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인간과 호흡하는 기술, 휴먼테크’로 곧장 맞대응했다. 그리고 이후 삼성전자의 ‘또 하나의 가족’과 LG전자의 ‘사랑해요 LG’가 기업 이미지 광고로 맞붙었다.

삼성전자 휴먼테크 광고

1990년대 국내 가전 시장은 두 회사 외에 대우전자가 가세하며 3파전 양상으로 변했다. 1974년 창업한 대우전자는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인수해 주력기업으로 키웠다. 대우전자의 ‘탱크 시리즈’는 LG, 삼성을 위협했다. ​대우의 공기방울 세탁기는 4년 연속 히트상품으로 등극했다.

대우전자가 부상하자 LG는 특허침해 민사소송을 제기하며 대우를 견제했다. ​삼성은 마케팅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당시 최고 인기배우 최진실을 광고모델로 기용하면서 바람을 일으켰다. LG는 품질로 대응했다. LG의 강점인 핵심 부품 모터와 컴프레서 기술력을 강조한 것.

이건희 회장은 1993년 "마누라 자식빼고 다 바꿔라"라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선언을 했다. 세계 초일류 글로벌 제품을 만들라는 특명이었다. 그러자 1995년 2월 취임한 구본무 회장은 ‘LG' 브랜드를 출범시킨다. 양사가 본격적인 글로벌 경쟁에 나선 셈이다. 1997년 삼성전자가 ‘지펠’이라는 양문형 고급냉장고를 내놓으면서 프리미엄 가전전쟁이 발발했다. LG는 ‘디오스’로 맞섰다. 이후 LG는 프리미엄 신가전에서 의류관리기, 식기세척기 등 잇단 히트작을 내놨다.

양사의 자존심 경쟁은 소송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92년 LG전자와 삼성전관(현 삼성SDI)은 브라운관 TV 시장에서 특허권을 둘러쌓고 싸웠다. 이 사건은 결국 양사가 특허를 공유하기로 합의하면서 일단락됐다. 2012년 9월에는 LG디스플레이가 삼성디스플레이와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 소송을 내면서 2라운드에 접어들기도 했다. 2017년 10월에는 삼성전자가 유튜브에 ‘QLED 대 OLED, 12시간 화면 잔상 테스트’라는 제목의 광고 영상으로 LG전자의 OLED TV를 공개 저격했다.

1980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왼쪽)와 이건희 회장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LG와 삼성은 대를 이어 경쟁했다. 창업자 시대에 이어 LG 구자경-구본무 회장, 삼성 이건희 회장에 이르기까지 전자산업에서 ‘총성없는 전쟁’을 계속됐다. 이같은 치열한 기술 경쟁은 종종 감정 싸움으로 비화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두 회사 모두에게 성장의 자양분이 됐다.

◆ 그리고, 앞으로

경영 3~4세로 만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구광모 LG 대표...라이벌 역사 진행형

이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구광모 LG 대표의 시대가 됐다. 지난 10월 25일 이건희 회장이 별세하면서 창업자 시대는 끝났다. 경영 3~4세가 이끌면서 다시 협력의 필요성이 커졌다. 이 부회장과 구 대표가 ‘호형호제’하면서 지내는 모습은 과거 이병철 창업자와 구인회 창업자의 초기 시절과 오버랩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반세기가 넘는 긴 시간을 ‘숙명의 라이벌’로 경쟁한 삼성과 LG는 글로벌 전자업체로 성장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간 매출액 230조4000억원, 영업이익 27조7700억원을 기록했다. LG전자는 매출액 55조원 규모다.

삼성이 LG에 비해 크게 앞서는 이유는 반도체 부문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전적으로 고 이건희 회장의 공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반면 LG는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 ‘빅딜’ 정책에 따라 LG반도체를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에 넘겨야 했는데, 이는 고 구본무 회장의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구광모 LG 대표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라디오 개발로 대한민국 전자산업을 개척한 LG전자는 TV에 이어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전통 생활가전 분야에서 시장 트렌드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빨래 건조의 새 지평을 연 건조기, 이제 가정의 필수품이 된 공기청정기, 외산 일색이었던 무선청소기 시장에서 국산으로 교체 바람을 일으켰던 A9 무선청소기 등이 대표적이다.

LG 관계자는 자사의 역사를 일러 “국내 전자산업 발전과 기술자립의 역사”라고 말한다. LG전자는 여전히 새로운 기술 혁신에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성공 여부는 미지수다. 수제맥주 제조기, 가정용 식물 재배기, 롤러블TV 등은 신기하지만 활용성과 비싼 가격 등으로 판로에 애를 먹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에 안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신제품과 시장개척에 나선 도전정신이 ‘글로벌 LG’ 위상을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LG전자는 이미 세계 1위 가전업체 월풀도 넘어섰다. 과거 우리나라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월풀 냉장고 등을 되돌아보면 격세지감이다. 하지만 월풀은 세계 최대 미국 시장 기반으로 한 빌트인 가전의 강자여서 LG전자로서는 아직 경계를 늦출 수 없다.

삼성전자는 2018년 8월 향후 3년간 국내 투자 130조원을 비롯해 총 18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신규 채용 인원만 4만명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미 2018~2019년에 110조원을 투자했고, 올해도 시스템반도체와 낸드플래시 등 반도체 분야 위주의 투자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여전히 선두권과 차이가 있어 극복해야 할 과제다. 생활가전에서 LG 신가전에 밀리는 점도 숙제다.

이재용 부회장과 구광모 대표의 앞에는 인공지능(AI), 로봇, 자동차 전장부품 등의 첨단 전자 분야가 같이 놓여 있다. 전자산업 숙명의 라이벌 역사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시대를 맞아 여전히 진행형이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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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llc 2020-11-16 11:42:14
좋은 라이벌 의식이고 앞으로도 다양한 라이벌 의식이 필요할거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