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큰 별' 이건희, 오늘의 삼성 키운 '역사적 경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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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큰 별' 이건희, 오늘의 삼성 키운 '역사적 경영자'
  • 김국헌 기자
  • 승인 2020.10.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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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와 '휴대폰' 양대 축으로 삼성 세계 초일류 전자기업 만들어...사회공헌 활동도 경영의 한 축으로
아버지 이병철과 다른 경영방식으로 삼성전자 꽃 피워내
정경유착, 노조와해, 삼성자동차 실패 등 비판과 흑역사도 다수 존재

재계의 큰 별 이건희(李健熙) 삼성전자 회장이 10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 회장은 지난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경영일선에서 물러났고, 이후의 경영 활동은 아들 이재용 부회장에 의해 이뤄졌다. 삼성전자는 비교적 침착한 모습이지만 슬픔에 잠겨있는 분위기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의식을 잃은 지 6년이 지난 만큼 예상됐던 비보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아프다"라고 말했다. 

삼성은 한국 사회에서 기업 이상의 특별한 존재다. 삼성은 막대한 경제적 기여 외에도 한국의 국격까지 높이는 회사였다. 삼성이 갖고 있는 이런 실제적 · 상징적 의미의 상당 부분은 누가 뭐라 해도 바로 이 회장에 의해 틀을 잡은 것이 분명하다.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만든 틀에서 시작했으나 그 틀을 벗어나 선대와 다른 방식으로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만들었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출생부터 회장이 되기까지...회장 취임 후엔 혁신의 대명사로

이 회장은 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북도 대구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얼마 안가 아버지 이병철의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의 할머니댁에서 3살 때까지 자랐고,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니다가 서울사대부고에 진학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상학과(경영학과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자퇴하고 와세다대학 상학부에 진학해 졸업했다. 이 회장은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하고, 19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역임했다.

그는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됐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인 그가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된 것은 형들인 이맹희 CJ 명예회장과 새한그룹을 창업한 둘째 이창희가 아버지를 청와대에 고발하는 이른바 '왕자의 난'을 터트리는 바람에 후계자 구도에서 쫒겨났기 때문이다. 이병철 회장은 자식들의 반란을 모두 진압했고, 그동안 경영성과를 내 온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낙점했다.

이건희 회장은 회장이 된 뒤 이듬해이자 삼성그룹 창업 50주년이 되는 1988년에 삼성의 제2 창업을 선언하고, 인간중심·기술중시·자율경영·사회공헌을 경영의 축으로 삼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그룹의 21세기 비전으로 정했다.  일본인 고문인 후쿠다에게서 받은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를 보고 큰 충격의  받은 그는 1993년 6월부터 위로부터의 적극적인 혁신을 시작했다. 디자인 전문가로 89년 삼성이 영입한 후쿠다 다미오가 작성한 56쪽자리 보고서에는 '기본이 안돼 있는 삼성'에 대한 냉혹한 평가가 담겨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며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을 강조한 ‘신경영 선언’을 선언했다. 신경영 10주년인 2003년에는 ‘천재경영론’, 2010년 ‘위기론’, 취임 25주년인 2012년 ‘창조 경영’ 등 변혁을 통해 ‘초일류 기업’의 꿈을 다져왔다. “품질을 위해서라면 생산·서비스 라인을 멈추라”는 지시로 시작된 ‘라인 스톱제’, “문제가 생기면 5번 정도는 이유를 따져보라”는 이건희식 ‘5WHY’ 사고론, ‘디자인과 경영은 별개가 아니다’는 디자인경영론, 학력·성별제한을 없앤 ‘열린 채용’ 제도 같은 혁신도 이건희 회장이 만들어낸 기업문화다.

'반도체'와 '휴대폰' 양대 축으로 삼성 세계 초일류 전자기업 만들어...사회공헌 활동도 경영의 한 축으로 

삼성은 이건희 회장 체제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이 회장은 삼성을 '한국의 삼성'에서 '세계의 삼성'으로 변모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취임 당시 10조원이던 매출액은 2019년 314조원으로 커지며 부동의 1위가 됐다. 영업이익은 2000억원에서 72조원으로 259배,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414조원으로 뛰었다. 삼성전자 단일회사가 전체 법인세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0%나 될 정도로 삼성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독보적이다. 인터브랜드의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611억달러(약 71조원)로 애플,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코카콜라에 이은 세계 6위다. 종합전자기업으로는 세계 최고이자, 미국 이외 기업으로는 맨 앞자리에 있다.

이건희 회장의 성공신화를 써낸 삼성의 양대 사업은 반도체와 휴대폰으로 대표된다. 두 사업 모두 그의 결단력의 산물로 평가된다. 양대사업을 축으로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를 전세계 1등 기업으로 키워냈다. 시장 조사기관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상성전자의 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D램 41.4%, 낸드플래시는 27.9%로 독보적 1위를 지키고 있다. 삼성의 스마트폰은 3분기 시장 점유율 22.4%로 전세계 1위를 차지했다.

전자사업은 선대회장인 이병철 회장이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하며 시작했다. 이 회사는 84년 2월 지금의 삼성전자로 사명을 바꿨다. 1974년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에게 반도체 사업 진출을 건의했다. 당시 경영진들은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데 반도체가 가능하겠느냐”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1974년 12월 6일 사재를 털어 자금난에 허덕이던 회사인 한국반도체의 지분 50%을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어 부친을 설득, 반도체 사업 진출을 이끌어 냈다. 한국반도체 공장은 말이 반도체 공장이지 트랜지스터 웨이퍼를 생산하는 조악한 수준의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 페어차일드사 기술이전, 미국 실리콘 밸리 인력확보 등 엉청난 노력을 통해 1983년 12월 64kD램을 생산 조립까지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하며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10년에서 4년으로 좁히는데 성공한다.

1993년 6월에는 삼성은 8인치 양산 체제를 세계 최초로 구축한다. 당시 반도체 웨이퍼는 6인치가 표준이었지만 이 회장은 생산량 확대가 용이한 8인치 웨이퍼 개발을 지시한다. 그 결과 삼성은 생산력에서 일본 기업을 월등하게 앞서며 세계 1위에 올랐고, 이후 22년 동안 메모리 분야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1990년대 앞서나가던 NEC, 도시바, 후지쯔 등이 불안정한 업황 때문에 주저하는 와중에도 오너의 결단력으로 이들 기업의 4~5배 규모에 이르는 과감한 설비 투자를 지속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갤럭시 S1~S6
왼쪽부터 갤럭시 S1~S6

또 이건희 회장은 휴대폰 사업을 주력사업으로 육성했다. 삼성은 1994년 애니콜 브랜드의 첫 제품인 SH-770을 출시하며 휴대폰 시장에 뛰어들었고, 국내시장 점유율 50%를 넘기며 '애니콜' 신화를 만들어낸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선보이면서 삼성 휴대폰 사업은 위기를 맞는다. 아직 국내 제조사들은 피쳐폰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반면 아이폰은 전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며 시장을 장악했다. 이 회장은 무선 사업부를 전면에 배치하는 체질 개선으로 초강수를 뒀고, 삼성 휴대폰 기술의 총 집약체인 갤럭시S를 재빨리 선보였다. 아이폰보다 늦었지만 스마트폰으로의 빠른 방향 전환은 삼성전자를 세계 1위 휴대폰 기업으로 만든, 이건희의 결정적 공이었다. 갤럭시S는 출시 7개월만에 전세계적으로 1000만대가 팔리면서 삼성 휴대폰 사업의 부활을 알렸다.

갤럭시S시리즈부터 삼성은 글로벌기업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세계 1위 제품을 본격적으로 늘려나간 시기도 이 때부터다. 이전까지 D램 반도체에 국한됐던 삼성의 '세계 최고' 제품이 급격하게 늘었다.

이 회장은 불량품이 나오면 해당 생산라인 가동을 전면 중단하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하는 등 품질 제고에 온힘을 쏟았다. 1995년 3월 구미공장에서 열린 ‘무선전화기 화형식’은 상징적이다. 당시 무선전화기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자, 이 회장은 불량제품 15만대(150여억원 어치)를 수거해 공개 화형식을 가졌다. 품질 경영을 향한 비장한 각오는 지금까지 삼성의 정신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1995년 '애니콜 화형식'은 이건희 회장의 품질 철학을 알 수 있게 한 사건이었다.
1995년 '애니콜 화형식'은 이건희 회장의 품질 철학을 알 수 있게 한 사건이었다.

 

이 회장은 사회공헌활동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를 기업에 주어진 또 다른 사업으로 여긴 것이다. 이 회장은 사회공헌활동을 경영의 한 축으로 삼도록 했다. 1994년 삼성사회봉사단을 출범시켜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특히 기업으로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첨단장비를 갖춘 긴급재난 구조대를 조직해 국내외 재난 현장에서 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맹인안내견 등 동물을 활용하는 사회공헌도 진행하고 있다.

스포츠계 업적도 빼놓을 수 없다. 1997년부터 올림픽 톱 스폰서로 활동하며 세계 스포츠 발전에 힘을 보탰으며, IOC 위원으로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큰 힘을 보탰다.

父 이병철과 다른 경영방식으로 삼성전자 꽃 피워낸 이건희

이병철 삼성 창업자와 젊은 이건희
이병철 삼성 창업자와 젊은 시절의 이건희 회장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인 이병철 창업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회사를 키웠다. 두 사람은 국내 최고 기업을 이끄는 총수로서 경영에 남다른 열정과 집념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경영방식은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이병철 회장은 스케일이 크면서도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강과 같은 평가를 받은 반면, 이건희 회장은 스케일이 클 뿐 아니라 구상의 방향이나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병철 회장의 경우 술도 마시고 대인관계가 활발했던 반면 이건희 회장은 포도주 외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대외 활동이 거의 없어 '은둔의 경영자'로 통했다.

이병철 회장이 일의 성과와 결과를 우선했다면 이건희 회장은 성과뿐 아니라 과정도 중시했다. 이병철 회장은 엄격한 관리와 감사를 중요시하고 신상필벌의 원칙으로 사내에 비리와 부정이 발붙일 여지를 없앴다면 이건희 회장은 감사에 대해서는 잘못을 찾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영진단으로 기능할 것을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은 업무의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중시해 잘못이 있을 때 벌을 주는 것보다 잘한 일이 있을 때 상을 주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과거의 성과는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대비하는 과정의 의미도 있다는 것이다. 신상필상 원칙은 이병철 회장 시절과 비교할 수 없는 파격적인 성과급, 스톡옵션 부여 등 성과유인책에서도 드러났다. 이건희 회장은 '끼'있고 창조적인 인재를 선호했다.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에게 '실패의 자산화', 즉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할 것을 주문했다. 이건희 회장 본인은 경영의 큰 그림과 미래변화 대비책을 구상하는 데 전념했다. 

이건희 회장은 경영진을 부를 때는 무엇 때문인지 사전에 짐작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이병철 회장은 경영진들이 무엇 때문인지 예측을 하고 준비해서 가지만 이 회장은 대부분 더 큰 주제를 갖고 얘기했다. 이런 면모는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 '창조경영' 등 굵직굵직한 경영 화두로 재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샌드위치 위기론' '베이징 발언' 등 삼성 그룹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발언을 한 데서도 드러났다. 

이병철 회장은 첨단설비, 공장효율화 등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이건희 회장은 브랜드, 디자인, 창조 능력 등 무형 자산이 훨씬 더 강조했다. 이병철 회장은 '삼성이 하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삼성은 어떤 제품을 만들어내든 국내에서 일등을 해야 하고 한국에서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반면 이건희 회장은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펼쳤다. 반도체, LCD, 휴대전화 등 핵심경쟁 사업에 경영자산을 집중했고, 한국 최고가 아니라 '세계 최고'(WORLD BEST)를 추구했으며 그 결과 현재의 삼성을 만들었다.

재계 관계자는 "이병철 회장이 삼성의 초석을 이루었다면 이건희 회장은 다른 방식으로 삼성의 꽃을 피운 훌륭한 경영자"라고 말했다. 

정경유착, 노조와해, 삼성자동차 실패 등 비판과 흑역사도 다수 존재

하지만 이러한 빛나는 업적 이면에는 이건희 회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와 흑역사도 다수 존재한다. 이건희 회장은 정경유착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영자였다. 이건희 회장은 전두환·노태우 특검 재판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100억원 뇌물 제공이 밝혀져 1996년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이 불법 정치자금을 모은 '차떼기 사건'에도 연루됐다. 2007년엔 삼성그룹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삼성의 광범하고 조직적인 불법 비자금과 로비, 차명재산 의혹이 드러났다.

2008년 대국민 사과를 하는 이건희 회장

이 회장은 2008년 ‘삼성비자금 특검’을 거치면서 양도소득세 456억원을 포탈한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다. 이 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하고 삼성 경영에서 물러났다. 이 회장은 2008년 비자금 특검으로 퇴진하면서 순환출자 해소와 지주회사 전환을 약속했다. 숨겨왔던 차명 재산도 실명전환 뒤 벌금과 세금을 내고 남은 조 단위의 돈을 사회환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무노조 경영을 하면서 행해온 노조와해 활동들도 비판을 받는다. 이건희 회장은 선대 이병철 때부터 내려온 무노조 경영을 본인도 그대로 이어 받았는데 이건희 회장 시절 삼성은 노조활동을 방해하는 여러 일화들로 악명이 자자했다. 특히 여러 사업장에서는 노조결성이 의심되는 직원들의 휴대폰, 전화를 도감청은 물론이고 미행까지 서슴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건희 회장의 대표적 흑역사 중 하나가 자동차 사업이다.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 광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장은 1995년 숙원사업이었던 자동차 분야에 진출했지만, 외환위기 등을 겪으며 실패했고, 4조3000억원의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1999년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아픔을 겪었다.
 

김국헌 기자  lycaon@green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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