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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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트립
  • 조원영
  • 승인 2016.08.1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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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건           언론인

 
비전 트립(Vision Trip)이라고 하니 뭔가 우아한 여행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사람들은 으레 천하의 절경이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휴식과 재충전 등을 생각할 것입니다. 아프리카 중동부의 나라 우간다로 가는 비전 트립에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우간다는 기자 초년생 때 서방 언론에서 악명을 날리던 이디 아민이라는 독재자의 나라로 저의 뇌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971년 쿠데타로 집권해서 1979년 실각할 때까지 8년 동안 수십만 명의 반대세력을 학살하고 온갖 기행으로 서방 언론의 조롱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1976년에는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이 이스라엘 승객들을 태운 에어 프랑스 여객기를 납치해 몰고 간 곳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이어서 다시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특공대원들이 엔테베 공항으로 날아가 암호명 ‘번개작전’으로 자국민들을 구출함으로써 이스라엘에겐 세계사에 남을 특공작전의 명성을 안겨준 반면 아민은 독재정부의 무능을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우리나라도 군사정부 시절이었던 당시, 외교적 비중도 낮은 우간다 기사가 국내 언론에 비중 있게 다뤄진 데는 독재에 대한 반감 분위기도 투영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10년 전 제3세계 불우 어린이를 후원하는 자선단체 컴패션 코리아를 통해 9세 된 우간다 어린이를 후원키로 한 것 또한 순전히 그당시 썼던 이디 아민 기사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 겁니다.

지난 6월 저는 컴패션이 우간다 비전 트립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0년 사이에 우간다 소년은 19세의 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동안 편지와 사진을 주고받았으나 직접 만나서 장성한 모습도 보고, 장래의 계획도 듣고 싶었습니다.

후원자 20명과 2명의 인솔자로 구성돼 7월 27일 서울을 떠난 비전 트립 팀에 그렇게 동참하게 됐습니다. 후원자들은 저마다 제3세계 어린이 한 명 이상을 후원하고 있었는데 그중 우간다 어린이 후원자는 저를 포함한 6명이었습니다.

8박9일의 일정 중 아이를 만나는 것은 마지막 날 전날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에 앞서 일행은 4일 동안 4개조로 나뉘어 컴패션의 지원을 받고 있는 수도 캄팔라 근교에 있는 네 군데의 어린이 센터를 매일 한 군데씩 찾아가 그곳의 교육 및 생활상을 둘러보고, 그중 한 어린이 집을 방문해 선물을 전달하고 기도를 하고 돌아와, 저녁식사 후 호텔의 회의실에서 밤늦게까지 그날의 일과에 대해 토론하는 일정을 되풀이했습니다.

숲속에 황토색 벽돌과 기와로 지어진 건물이 들어서 있는 수도 캄팔라는 얼핏 유럽의 도시를 연상케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거대한 슬럼이었습니다. 거리를 메운 차들은 거의가 수입 중고차였고, 그 중 승용차 화물차 할 것 없이 일제 도요다 차 일색이었습니다. 낡은 차들은 시꺼먼 매연을 뿜어냈고, 자동차들이 일으키는 흙먼지와 합쳐져 캄팔라 하늘을 뿌옇게 했습니다.

일행이 나흘 동안 방문한 16개 어린이 가정들은 거의가 그런 슬럼 안에 있었습니다. 두 평이 될까말까한 공간의 절반을 커튼으로 가리고 안은 침실, 밖은 거실로 쓰면서 4~10인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거실 한 쪽에 놓인 화덕이 주방이었고, 전기는 더러 공급됐지만 수도는 없었습니다. 노란 물통이 100여개 줄지어 있는 마을의 샘터는 신이 이들에게 허락한 유일한 선물일 듯했습니다.

한 집의 탁자 위에는 지난 3월 캄팔라 시장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현 시장의 선거벽보가 놓여있었습니다. 눈이 크고 얼굴에 기름기가 번들번들한 얼굴이었습니다. 시민들의 이런 비참한 삶이 그의 안중에 있을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가정방문을 하고 돌아 나오는 발길은 무거웠습니다. 그 집 애들보다 더 헐벗은 어린이들이 졸졸 따라오며 손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아이들이 미군이 던져주는 초콜릿을 받으려고 쫓아다니는 1950년대 한국의 풍경이 겹쳐졌습니다.

이 거대한 빈곤 앞에서 어린이 한두 명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행동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하는 무력감이 엄습했지만, 한 어린이라도 돌보는 것이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라고 자위하며 애써 무력감을 달랬습니다.

컴패션 국제본부는 전 세계 26개국에서 170만명의 어린이를 돌보고 있고, 컴패션 코리아는 그중 12만 명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컴패션의 12개 후원국 중 미국 다음으로 기여가 큽니다. 우간다만 해도 모두 8만8,000명의 어린이 중 컴패션 코리아가 돌보는 어린이만 5,000명이 넘습니다.

컴패션 어린이 센터의 어린이와 길거리의 어린이 사이에는 차이가 확연했습니다. 센터의 어린이들은 장래의 계획을 물으면 정치인, 비행기 조종사, 의사, 간호사, 교사, 변호사 등이 되겠다고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얼굴의 좋은 영양상태는 표정의 밝기를 나타내는 듯했습니다. 우간다의 모든 어린이가 컴패션 센터의 어린이처럼 되는 날 우간다는 분명 비전이 있는 나라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 점에서 우간다의 8만8,000명은 이 나라의 빈곤퇴치의 밀알로서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닐 듯했습니다. 이미 사회에 나와 국회의원 의사 변호사 등으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사람도 수백 명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장차 우간다를 바꾸는 인재가 되어 달라는 것은 컴패션의 변함없는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제가 후원하는 아이 로날도 아테게카는 건장한 체구의 청년으로 자라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을 가서 비즈니스를 배워 큰 장사꾼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장사를 배우려면 대학 진학보다 일찍 취직해서 경험을 쌓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말해줬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이웃들의 빈곤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도 들려줬습니다. 아테게카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것이 이번 여행에서 내가 찾은 가장 소중한 비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조원영  jwyc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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