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외전(外傳), 검사 본전(本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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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외전(外傳), 검사 본전(本傳
  • 조원영
  • 승인 2016.02.1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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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중                 언론인

피의자를 마구 두들겨 패는 검사의 폭력 장면으로 시작되는 영화 ‘검사외전’이 설 연휴 극장가를 점령했다고 합니다. 16일까지 관객 수가 무려 820만 명으로 영화 사업자들의 꿈인 1,000만 관객 돌파가 어렵지 않다는 게 영화 기자들의 전망입니다. 보름 동안 우리나라 사람 6명 중 1명이 이 영화를 봤다는 얘기인데, 놀라운 관객 동원입니다.

검사외전에 왜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들었을까요? 사람들은 영화에서 검사의 어떤 모습을 보고 즐겼을까요. 개인적인 생각인데, 영화의 흥행 요건은 대중성, 오락성, 출연 배우 그리고 플러스알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검사외전의 플러스알파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막후에서 벌어질 것 같은 검사들의 권력 추구와 권력남용의 적나라한 속성을 스크린에 투영함으로서 사람들의 잠재심리 속에 축적된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카타르시스의 감성 코드라고나 할까요.

한 검사가 폭력을 휘두르며 수사를 하다가 피의자가 죽자 상해치사혐의로 투옥되는데, 그 이면에는 정치권력 검찰간부 개발업자의 결탁으로 은폐와 조작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검사는 사기꾼을 내보내 주는 대신 자신의 혐의를 벗겨내는데 협조하도록 거래를 합니다.

종국에 투옥된 검사는 법정에서 무죄를 입증하지만 자신은 폭력검사였다고 고백함으로써 나름 선량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영화 장면에는 지방 검찰청 청사 전경이 나오고 검사의 대화 속엔 출신 고등학교가 실명으로 마구 거론됩니다. 다큐멘터리 효과를 노리려는 제작진의 의도인가 봅니다.

작품 밀도가 높아 보이거나 감동적인 스토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관객이 장사진을 이루는 이유는 영화의 소재가 일반인들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은 검사들의 비윤리적 에고이즘을 상징화함으로써 부당한 권력남용에 대한 반감을 풀고 싶은 카타르시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검사의 감옥생활 설정에 희열을 느꼈을 것입니다.

근래 영화에 검사의 부정적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사회현상의 반영입니다. 언론에는 간단없이 검찰의 인권침해나 부패 스캔들 또는 이상한 판사들의 행태가 적지 않게 보도됩니다.

미디어에 검사나 판사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한국사회가 양적으로 급속히 팽창해졌지만 사회의 최고 엘리트 집단인 법조계가 순기능을 하지 못한 채 병들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1월 말 ‘19년 지각한 정의’ ‘한 검사의 오판이 부른 이태원 비극 19년’이란 제목이 일간 신문을 도배했습니다. 검사의 자질과 판단, 직업관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기사였습니다.

1997년 4월 3일 밤 10시 이태원 햄버거가게 화장실에서 대학생 조중필 씨가 칼에 무참히 찔려 살해됐습니다. 미군 자녀가 범죄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이 사건을 처음 수사한 미육군범죄수사대(CID)는 목격자 진술과 증거물을 확보한 후 아서 패터슨이란 미성년자를 정범으로 지목하고 한국 경찰에 넘겼습니다. 이 수사를 인계받은 용산 경찰서는 CID수사를 토대로 자체 수사를 벌여 패터슨을 정범, 사건 당시 화장실에 같이 있던 그의 친구 에드워드 리를 공범 혐의자로 지목하고 검찰에 넘겼습니다.

이 사건을 맡은 검사는 경찰수사를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그는 고집스럽게 화장실에 같이 있던 에드워드 리를 단독정범이라고 단정해서 기소했습니다. 검사는 증거물보다는 부검의의 소견과 자신의 판단에 의존했습니다.

1심과 2심에서 검사의 주장은 먹혀들었습니다. 그러나 1998 대법원은 증거불충분의 이유로 고법으로 파기환송했고 고법은 에드워드 리의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검찰은 패터슨에 출국정지를 시키고 다시 수사를 해야 함에도 담당검사 교체로 어물어물하는 사이, 패터슨은 1999년 8월 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피해자 가족이 사설탐정을 쓰면서 패터슨의 행방을 찾고, ‘이태원살인사건’이란 영화가 제작되는 등 이 살인사건을 끝까지 추적하려 했던 것은 검찰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였습니다. 검찰은 재판에 실패한 사건에 입맛을 잃었던 것일까요. 2009년 10월 미국 법무부로부터 패터슨이 미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도 범죄인 인도 요청을 우물쭈물하다가 국회법제사법위원회에서 질의가 나오자 그때야 움직였다고 합니다.

패터슨은 작년 9월 한국으로 송환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29일 재판에서 아서 패터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습니다. 사건 당시 17세의 미성년이었던 패터슨은 37세의 중년에 이르렀고, 아들의 한을 가슴에 묻고 진범의 단죄를 갈망했던 50대의 어머니는 70대 노인이 되었습니다. 법률가가 아니라도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법언을 실감하게 합니다.

이태원살인사건의 19년 재판과정을 보면서 비록 악의가 없다 하더라도 검사의 자질과 판단력이 피의자 가족이나 사회정의 실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이 사건은 증거와 증언에 대한 검사의 탐구가 얼마나 치열해야 하는지를 생각케 합니다. 하물며 사건을 담당한 검사가 권력과 부패의 유혹에 넘어간다거나 자만심과 편견을 갖고 형사사건을 다루고 피의자의 인권을 유린한다면 당하는 사람의 입장이나 사회적 부작용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검사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핵심 엘리트 집단입니다.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 대상입니다. 그러나 시민의 검사에 대한 시선은 긍정적이기보다 훨씬 부정적입니다. 한국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국민들이 생각하는 근저에는 검찰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회정의에 대한 불신이 강하면 그 사회 구성원이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잘못되어 가는 것을 안에서든 밖에서든 바로잡을 수 있으면 건강한 사회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최고 엘리트집단인 검찰은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갖고 있을 것 같지만 그런 움직임을 보여준 적은 아직까지 없는 것 같습니다.

조원영  jwyc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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